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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가 넘었을 때 벤은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침대의 본래 크기가 무색할 만치 벽에 바싹 달라붙은 뒤, 차가운 벽의 온도가 이마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난로를 사라고 집에서 보내준 돈은 이미 술값과 책값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였지만 벤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삭막하고 좁은 플랫에 존재하는 열은 제 자신의 체온으로 충분하다고 벤은 생각했다.
벤 휘쇼의 생활은 칼같이 지켜지는 편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는 그의 하루는 공부와 식사, 잠을 거의 규칙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공부 시간의 조금을 산책이나 조깅에 할애했고, 가끔은 공부를 제쳐두고 친구들과의 일탈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로, 대부분의 경우 그는 정말로 지정된 루트만을 돌고 돌며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 새벽 세 시에 잠들 때까지, 벤은 자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루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할지 알았고, 으레 그렇게 행동해 온 것이다. 그렇게 고정되었던 ‘틀’에 지장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나흘 전이었다. 그것은 벤이 잠드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어느새 시작되어 있었다.
벤은 미미한 소음에 귀를 틀어막았다. 새벽 세 시가 되어 칼같이 스탠드를 끄고 침대로 기어들어간 후 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음조차 멎어지면, 런던의 겨울 새벽은 일상의 누구라도 잠든 것처럼 조용해야 했다. 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정적이 며칠 전부터 깨지고 있었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소리가 그 주범이었다. TV소리, 사람의 웃음소리, 대화소리, 악다구니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소음은 크지는 않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제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덕분에 요 나흘 간 그는 평소답지 않게 몇 번이나 책상 앞에서 졸고 말았다. 넓지 않은 침대의 크기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벤이 벽에 이마를 대고 잠을 자는 습관도 절로 사라졌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겨우 잠이 든 그를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깨우곤 했고, 벤은 베개 맡에 둔 휴대폰 액정의 시간을 확인한 후 욕지기를 내뱉고는 했다. 옆집의 소음이 벽을 타고 오는 것이 분명했다. 벤은 나직이 입술을 깨물며 내일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은 벤의 귓가에 굵고 얇은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 그 때였다. 미미하게 들려오는 TV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배경삼아, 소리를 죽이려는 노력조차 없이 적나라한 신음이 벽을 타고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벤은 순간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TV소리 위에 포르노 채널의 소리가 중첩된 것이라고. 그러나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몸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브라운관을 통해 들리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벤은 이 플랫에 세 들어 사는 이웃 중에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단번에 잠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필요이상으로 적나라한 새벽의 소음이 시각적인 자극 없이도 그의 아랫도리를 뻐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도, 베개로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내키지 않는 손을 파자마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벤은 아침 일찍 거리를 뛰고 돌아와 굳은 얼굴로 플랫의 우편함 앞에 서 있었다. 제 이름이 적힌 우편함에 꽂혀있던 편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그 옆에 붙은 우편함에 쓰인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있는 벤의 우편함과 달리 온갖 고지서와 전단지가 잔뜩 꽂힌 우편함의 주인은 제가 모르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벤은 인상을 찡그리며 낯선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다니엘 크레이그. 그리고 플랫의 위층에서,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낯선 금발의 사내와 마주쳤다.
Hello.
Good morning.
푸른 눈의 남자와의 성의 없는 인사를 끝낸 후 벤은 계단에 발을 올리며 우선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을 어떻게 보냈든 오늘의 일과는 지켜야 하는 것이 그 나름의 법칙이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고 제 플랫의 문고리를 잡은 그 순간, 벤은 새벽 내내 귓가를 지배했던 신음의 한 가닥이 방금 지나친 남자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의 색이 옅은 머리카락과 무감하고 나른한 표정, 후줄근한 복장이 벤의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벤은 그가 여자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온갖 잡념으로 가득 차버렸다.
당연하지만, 벤은 하루 종일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는 새벽, 다니엘 크레이그가 사는 옆집에 갈 것을 결정했다.
2
벤은 의미 없이 쥐고 있던 펜을 결국 놓고는 앉은 채로 등만 돌려 침대가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온갖 것들을 적은 종이 낱장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을 때는 절로 한숨을 쉬며 종이를 구기고 싶었다. 무의식중에 현재 시간을 써놓은 것만 열 번이 넘었고, 그나마도 그 간격이 길지 않은 채였다. 결국 벤은 신경질적으로 펜을 책상 구석에 집어던지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잠이 왔으면 싶었지만 정신은 빌어먹게도 또렷해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고 밤이 깊어올 때마다, 벤은 제 가슴이 지난 새벽만큼 쿵쿵 뛰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기를 선택한 벤의 귀에 벽 너머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고 있던 그는 저도 모르게 벽에 바싹 귀를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석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둔 채, 어느 시간에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시생의 지위를 내밀며 새벽에 잠을 잘 수 없다 이야기할지, 공부를 할 수 없다 이야기할지 고민하던 벤의 귀에 어제와 같은 신음이 들린 게 그 때였다. 벤은 다른 생각 없이 침대를 박차고 나가 제 플랫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옆집 남자, 다니엘 크레이그의 문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더 안 받아.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느릿느릿 5cm쯤 열린 문의 틈새로 담배연기와 목소리만이 빠져나오더니 다시 쑥 들어가 버렸다. 벤은 잠시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는, 지체 없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은 다 그런 목적인가보지. 벤은 이유 없이 쓰게 웃다가 다시 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
이미 손님이 있다고.
인상을 찡그린 남자는 여전히 담배를 물고, 흘러내려간 바지춤을 추스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로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벤은 눈앞의 남자가 아침에 보았던 반팔 티셔츠를 아직 입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저를 천천히 훑어 내리는 노골적인 파란 시선을 마주치다가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벤은 조용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제 위치를 각인시켰다. 저는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그러자 남자는 담배 한 모금을 더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되물었다.
아. 무슨 문제라도?
벤은 잠깐 황망하게 시선만 굴렸다. ‘당신이 새벽에 하는 섹스 때문에 일상에 지장이 왔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해도 될지를 가늠하던 차,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군데 그렇게 오래 걸려. 무시하고 빨리 와. 벤의 입술은 그 때 열렸다.
이웃끼리 긴히 꼭 상의해야 할 문제가 생겨서요. 이웃끼리만.
남자의 시선이 묘하게 비틀려 다시 벤의 몸을 훑어보았다. 벤은 남자가 ‘나중에’하고 제 요청을 거절한 뒤, 다음에 벤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무감한 목소리로 조금만 기다리라 말한 뒤 문을 닫았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가 집 밖을 빠져나왔다. 벤은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를 무표정하게 마주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결국 플랫의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말았다.
들어와.
실례하죠.
침침한 조명이 가장 먼저 벤의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하게 쌓여있는 옷가지들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개수대의 설거지더미는 며칠째 물을 묻혀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벤은 침대에 앉아 다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도 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얘기란 게..?
벤 휘쇼입니다.
이름을 알아야하나?
어쨌든 옆집 사이니까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벤은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매우 낮은, 그리고 조금 쉬어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벤의 가슴을 쿵쿵 울리고 있었다. 새벽 내내 들어오던 그 목소리. 벤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의 직업에 대해 왈가왈부 할 마음은 없지만, 제가 고시생이라 새벽까지 공부를 합니다.
음.
요 며칠간 당신의 ‘직업적 의식’ 때문에 제 생활에 지장이 생겼는데요.
그렇군. 사과하지.
다 피운 담배를 탁자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남자는 두 무릎 사이로 팔을 축 늘어뜨린 후 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흥미 없는 목소리와 감정 없는 푸른 눈에 벤은 눈썹을 구겼다. 이런 대화로 이웃집 새벽의 소음이 개선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당사자로부터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벤은 이마를 짚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사과. 만 하시는 건가요.
뭘 더 바라지? 네가 말한 그 ‘직업적 의식’이 있어야 내가 밥을 먹고 사는데. 그쪽도 먹고 살려고 공부하는 것 아닌가.
잠깐만요.
할 말이 끝났으면 돌아갔으면 좋겠군. 배웅은 생략하지.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다시 입에 물고, 여태 열린 채인 바지춤 사이로 손을 넣는 남자였다. 벤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런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흥분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는 제 것을 스스로 쥐고 문지르고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굳은 벤을 쿡 찔러왔다.
네가 내쫓아서 돈도 못 받았잖아.
...
아니면 뭐야, 너도 나와 하려고 여기 온 건가?
...뭐요?
벤은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제 바지춤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망히 내린 시선에, 자신의 트레이닝 바지의 앞섬이 불룩하게 일어서있는 것이 보였다. 벤은 복잡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 손에 파정하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남자는 티슈 한 장에 손을 닦은 뒤 벤의 발 앞으로 떨어뜨리며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리고 벤의 얼굴과 바지춤을 번갈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낮고 쉰 목소리가 벤을 향해 떨어졌다.
내 하룻밤은 10파운드짜리다. 살 거냐? 옆집 고시생 꼬마야.
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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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파운드짜리의 욕정 분출 대상이 되는 느낌을 벤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10파운드를 주고 누구를 사는 상상은, 그가 하고 있는 공부와 관계없이 우스우리만치 쉽게 할 수 있었다. 벤은 자기보다 스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남자를 여전히 말없이 바라보며 그의 뒤에 제 것을 박아 넣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다니엘은 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혹은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담배를 빨아대며 웃고 있었다.
불편해 보이는군.
...
도와줄까?
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시늉을 하는 다니엘을 보며 기겁하고 발을 물렸다. 엉거주춤 일으킨 몸을 다시 풀썩 침대로 앉히며 다니엘은 시시한 듯 숨을 훅 내뱉었다. 벤은 꼴사나운 아래를 가리려는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그 자신을 납득시키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래?
여전히 제 아랫도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런 것 치고는 따로 놀지 않느냐는 다니엘의 물음에 벤은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을 방해하던 벽 너머의 이웃은, 이제 대놓고 자신을 팔며 벤을 그의 ‘직업적 의식’에 참여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손바닥에 배어나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대다 벤은 다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어쩔 줄을 모르는 자신을 대놓고 비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벽에는, 주의 해주세요.
차라리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일찍 자는 게 어때, 꼬마야.
담배 연기가 다시 다니엘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벤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의 대꾸 없이 다니엘의 플랫을 빠져나왔다. 다섯 발자국도 못 가 제 플랫에 돌아왔을 때 벤은 벽 너머에서 기묘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다리에 기대 무너지듯 주저앉아 억지로 자위하는 동안 10파운드짜리 남창 때문에 흥분한 자신을 저주하며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씹어댔다. 그리고 24시간 만에 꼭 같은 이유로 뱉어낸 정액이 묻은 휴지를 구석으로 던져버린 뒤, 일주일간 차곡차곡 쌓인 피로에 눌려 그 모습 그대로 잠들었다. 그 밤 벤의 꿈은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꿈이 이어지는 몇 시간 내내 벤은 옆집에 사는 나이 많은 남창과 지칠 때까지 섹스 했고, 그 비용으로 10파운드를 던지고 있었다.
거의 무용지물인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벤은 눈을 떴다. 플랫 안은 어두웠고 불편한 자세로 잠든 몸은 굳은 채 삐걱댔으며 바지춤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벤은 팔로 제 머리를 아프게 감싸고 무릎에 이마를 쿵쿵 찧어댔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옆집에 사는 이웃 남자가 단 하나의 가능성이었고 대답이었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벤은 팔만 위로 뻗어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끌어내려 액정을 쳐다보았다. 보고 싶지 않은 단어가 떠올라 있었고, 그래서 그는 새벽에 휴지를 던진 곳을 향해 제 휴대폰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10분 뒤, 다니엘은 플랫의 문을 열고 벤을 마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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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은 굳은 표정의 벤이 제 플랫의 문을 두드리고 집 안에 멋대로 들어오는 것을 묵인했다. 벤과 자신이 이렇게 자주 볼 사이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벤 때문에 이틀 동안 밥벌이를 못 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는 그냥 문을 닫고 담배만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일 뿐이었다. 그는 원래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공부를 한다는 이웃 꼬마가 하루만에 마음을 바꿔 제 집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벤이 오늘의 밤 상대가 될지 말지만을 가늠하며 짓이겨진 담배로 가득한 탁자에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벤은 침대 앞에서 몸을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티셔츠는 어제와 다른 것이었지만 잔뜩 구겨지고 더러운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것이 없었다.
또 내가 공부에 방해가 됐나?
싸구려 술을 한 모금 삼키고 곧장 담배를 입에 대는 다니엘을 보며 벤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벤은 다니엘과 섹스를 해본 것도,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니엘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벤의 일상을 삽시간에 망가뜨리고 우선순위를 달리하며, 벤이 결국 스스로 제 말을 번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벤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 변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침대에 누워 벽을 통해 들리는 소음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벤은 침대에 앉아 제 앞에 서있는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꼭 하루 전 다니엘이 자신을 쳐다보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뭐지?
당신을 사러 왔는데요.
다니엘은, 재차 말하지만, 벤이 무슨 마음으로 제 집에 들어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고한 척 ‘그런 사람’이 아니라던 말을 하루도 못 가 바꿔버린 애송이를 조금 비웃고 말았을 뿐이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술을 마저 비워내고 담배를 문 채 벤을 내려다보았다. 부자연스럽게 얼어있는 벤의 표정은 다니엘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새파란 눈으로 벤의 초록색 눈을 마주보다, 다니엘은 벤의 머리를 헝클이며 씩 웃었다. 담배 끝을 잘근 씹다 아무렇게나 퉤 뱉어버린 뒤, 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바지춤을 열며 낮게 중얼댔다.
두 번째부터는 20파운드다. 꼬마야.
벤은 제 바지 사이로 들어오는 거친 손가락에 순간 몸을 움츠렸다. 속옷이 벗겨지고 다니엘의 혀가 끝에 닿아 능숙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은 다니엘과의 행위를 통해 일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합리화를 스스로에게 시킬 예정이었다. 옳지 못한 방법이나 이것을 통해 전처럼 틀에 박힌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완전히 부서지고 있었다. 다니엘이 벤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과 꼭 같은 속도로.
벤은 처음이었고, 다니엘은 익숙했기에 다니엘은 벤이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섹스를 하는 내내 알려주었다. 요령 없이 힘만 주며 박아대는 사람을 다루는 것은 다니엘에게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다니엘은 근육을 조이고 풀며 흔들렸고 스팟을 스스로 찧으며 타이밍을 조절했다. 그러다가 제 위에 올라탄 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막내 동생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형이 된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숨을 몰아쉬는 벤이 제 안에 파정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늘 그랬듯 딱히 느끼지 못했을 제 것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 자신이 사정했다는 것까지 알아챘다. 그건 다니엘로서는 딱히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 바라던 것이 잘 되지 않은 것을 볼 때의 느낌과도 비슷한 감정으로.
그래서 다니엘은 제 위에 널브러진 벤의 몸을 치우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뜨거운 체온에 몸을 겹친 채 결국 잠에 빠지는 옆집의 어린 애송이를 향한 감정이 끝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부는 성가심이었고, 일부는 씁쓸함이었다. 침대에 늘어진 벤의 등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다니엘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동이 터올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침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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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 터올 무렵 침대 밑에서 잠이 든 다니엘은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푸른 눈은 어깨까지 둘러진 이불을 발견했다. 다니엘은 소리의 출처로 고개만 돌려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벤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젯밤 벗었던 셔츠와 바지를 다시 주워 입은 채, 까치머리의 옆집 고시생은 옆집 남창의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주제넘은 행동에 다니엘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차마 대놓고 그만두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벤은 다니엘이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담뱃갑을 쥐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다니엘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남은 접시의 거품을 헹궈 건조대 위에 쌓아놓은 뒤, 손에서 물을 털고 다니엘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니엘은 멍하니 벤의 자취를 좇고 있었다. 벤의 맨발이 다니엘의 이불 앞에 멈춰 섰을 때, 다니엘은 벤에게 쓸 데 없는 짓은 관두고 그냥 집으로 가버리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벤이 이불 위로 떨어뜨린 꾸깃한 10파운드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뱉지도 못한 말을 삼켰고, 아주 잠시나마 자신이 어떤 종류의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파운드짜리 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옆집에 사는 애송이는 그가 말한 대로 다니엘을 사러 왔었던 것뿐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갈게요. 밥 사드세요.
다니엘은 바닥에 앉은 채로 플랫을 나서는 벤의 발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번째로 들렸을 때에야 10파운드를 집어 제 눈앞까지 끌어올렸다. 구김이 가득한 지폐를 보며 다니엘은 피식 웃었고,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폐로 연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이건 밥값이 아니라 몸값이었다. 벤 휘쇼의 합리화는 그 자신에게도, 다니엘에게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벤 또한 그럴 것이다. 지난밤의 대가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후, 다니엘은 이불을 침대 위로 치우고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에 치를 떨며 죽은 정액을 긁어내고, 화장실에서 나와 반팔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플랫을 나섰다. 벤이 준 10파운드는 담배 값이 되었다. 다니엘은 벤이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벤은 책상에 앉아 책을 편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쩐지 조금 낯설어진 것 같은 책상에 앉은 채, 그는 당연하게도 다니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에 다니엘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벤은 다니엘과의 섹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갖은 문제 중 어떠한 종류로도 해답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도 쉽게 제 뒤를 내주는, 벽 너머로만 듣던 신음을 날것 그대로 들려주는 다니엘을 안으며, 벤은 사실상 평범한 고시생이었던 자신의 일상을 포기했다. 되찾기는커녕 제 스스로 더 꼬아버렸고, 발끝을 물들인 진창에 온몸까지 푹 적셔졌다. 그의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일상을 되찾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상을 이을 것인가로 바뀌었다. 이날 이후로도 벤은 공부를 하고 다니엘은 그의 집으로 손님을 받을 것이며, 두 사람은 플랫의 이웃 사이일 터였다.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꼭 어제의 자신처럼 침대 밑에서 잠든 다니엘을 보았을 때, 벤은 순간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주위에 떨어져있는 헤아리기도 힘든 담배꽁초를 발로 쓸어버리고, 여태 제가 덮고 있었던 이불을 그에게 덮어주었다.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침대 시트와 이불은 커튼도 없는 플랫의 창문 밖에서 그대로 들어오는 햇빛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칙칙한 플랫에서, 다니엘의 금색 머리카락만이 어울리지 않게 빛났다. 벤은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에 손을 뻗을 뻔했다.
거기까지 떠올리던 벤은 의미 없이 쥐고 있던 펜으로 의미 없이 종이에 이름을 썼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으니 어떤 이름을 썼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벤은 다니엘이 제 돈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무감한 얼굴, 흡사 거지같은 꼴로 감자튀김을 먹는 모습을. 벤은 물론 그것이 가능성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억지로 책에 눈을 붙이며 다니엘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노력했다. 노력은 노력으로만 그쳐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시간만큼은 어쨌든 흘러갔다.
그 새벽에는 벽을 넘어 들리는 소음이 없었다. 새벽 세 시에 벤은 다니엘의 플랫 문을 두드렸고,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었을 때 어둠에 묻혀있는 텅 빈 플랫과 마주쳤다. 다니엘이 아침에는 돌아와 있을까, 벤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제 플랫으로 들어와 오랜만에 벽에 이마를 붙인 채로 눈을 감으며, 어쩌면 최근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6
벤은 새벽 내내 뒤척였다. 바람소리와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그 새벽 내내 계단을 밟는 소리, 옆집의 플랫 문이 열리는 소리로 둔갑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캄캄한 방 안에서 눈을 뜰 때마다 벤은 머리를 헝클였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귀를 막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벽에 닿는 이마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다니엘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오전 열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벤의 알람시계였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분리된 채로 플랫의 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늦은 시간까지 침대를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벤은 다니엘의 플랫 문이 열리는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챘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스스로조차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벤은 문을 열었고, 맨발로 복도를 뛰어 다니엘의 플랫 문을 열었다. 노크는 생략했다. 벤은 반팔 차림의 다니엘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현관을,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어제 안 들어왔던데요.
너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다니엘은 낮고, 여전히 조금 쉰 목소리로 조용히 대꾸했다. 그리고 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파자마 차림, 맨발의 꼬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꼬마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침대로 걸음을 옮기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가, 못 자서 그러는데. 나가주겠어?
벤은 다니엘이 주머니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 뜯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그것이 제가 주었던 돈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니엘은 가스가 거의 없는 싸구려 라이터로 몇 번이나 불을 붙였고, 겨우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벤은 다니엘이 떨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나돌아 다닌 사람이 멀쩡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추웠나 봐요.
눈이 왔지.
밖에 있었어요?
지나다니는 손님을 잡아야 했거든.
말을 하는 동안 다니엘은 침대에 앉았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무릎 사이로 두 팔을 늘어뜨렸다. 벤은 다니엘의 무감한 표정과 행동이, 노골적으로 제 직업적 위치를 드러내는 언사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가 숙여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벤은 다니엘의 손질되지 않은 지저분한 금발과,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데. 벤은 그의 고민이, 답 없는 질문이 다니엘의 집에 들이닥친 것과 동시에 다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벤은 다니엘의 드러난 팔뚝에 눈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팔이 제멋대로 뻗어나가 다니엘의 팔을 잡을 것만 같았다.
..돈은 벌었나요?
런던의 눈은 가족애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더군.
건물 앞에 쭈그려 앉아 눈을 맞으며, 다니엘은 케이크며 선물상자를 들고 귀가하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다. 그들을 비웃고 싶었지만, 그것이 결국 제 자신에 대한 경멸과 조소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가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왔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에 대해 흠을 잡아 깎아내리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니엘은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쓸데없는 감정으로 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찮은 일이었다.
밤을 새고도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눈길조차 받지 못한 밤과 새벽이 조금 추웠을 뿐이다. 순간 지난 시간동안 축적된 추위가 갑자기 밀려오는 것 같아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떨리는 손가락은 결국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침대 시트에 비벼 껐고, 그마저도 아까운 듯 남은 꽁초를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벤은 그 구질구질한 광경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병신 같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다니엘의 팔을 그래서 결국 부여잡았다. 몇 시간이나 바깥에서 얼어있어야 했을 팔은 뜨거웠다. 벤은 반사적으로 다니엘의 얼굴에도 손을 올렸다.
가, 이제.
..뜨겁잖아.
내버려둬.
당신 죽고 싶어요? 환장했어?
다니엘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눈을 껌벅대며 벤 휘쇼의 진짜 직업은 고시생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잘은 모르지만, 정말 급한 고시생이라면 옆집에 누가 살든, 설사 그가 남창이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벤이 자신과 함께 했던 하룻밤은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한 것이었다고. 잠들어버린 벤의 옆에서 다니엘이 새벽 내내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만 자꾸 떠올랐던, 어처구니없을 만큼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다니엘은 이제 정말로 자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자신이 혹시 정말로 아픈 거라면, 그의 플랫 이웃인 벤 휘쇼가 자신을 간호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후 벤의 행동은 그의 예상과 꼭 맞아떨어졌다.
7
벤은 다니엘의 낡고 더러운 신발을 벗기고 침대 위로 똑바로 눕혔다. 다니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고, 딱히 간병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벤은 발만 동동 굴렀다. 다니엘의 플랫에 깨끗한 수건이 없었기 때문에 벤은 제 플랫에서 새 수건과 언젠가 사놓았던 감기약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 수돗물을 받아 다니엘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찬 수건이 닿을 때마다 다니엘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지만 벤은 집요하게 다니엘의 온몸을 닦아주었다. 벤의 목적은 그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이었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벤은 아픈 사람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픈 사람이 다니엘이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가 없었다.
벤은 제 플랫에 있는 이불을 가져와 다니엘에게 덮어주었고, 장을 봐 두었던 재료로 다니엘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가장 큰 옷을 찾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다시 옆집으로 돌아가 다니엘의 열을 내리는데 주력했다. 저도 모르는 새 약을 삼키고 땀을 흘리며 잠을 자던 다니엘은 저녁 무렵에야 눈을 떴다. 벤은 침침한 플랫의 조명 밑에서 다시 다니엘의 푸른 눈을 보았고, 그제야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니엘은 말없이 눈알만 굴려 갑갑하리만치 둘러싸인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벤은 또 제 하루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애써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씻고 밥 먹는 게 좋겠어요. 여기는 따뜻한 물이 안 나오니까 저희 집으로 가요.
...
저녁도 해 놨으니까 그거 먹고 약 먹으면 괜찮을 거예요.
..싫어.
당신은 거부권 없어요.
벤은 수건을 뗀 다니엘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보았다. 여전히 열이 있었지만 펄펄 끓던 정도는 아니었다. 다니엘은 제 말이 모두 묵살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얌전히 벤의 집으로, 거의 기다시피 도착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땀에 전 옷을 벗자마자 다니엘은 다시 덜덜 떨었고, 벤은 그를 좁은 욕조에 구겨 넣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의 온도가 다니엘에게는 낯설었다. 목까지 차오르고 멈춰버린 물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만져보다가 다니엘은 온 힘을 다해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칫솔을 찾아 욕실로 돌아온 벤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물속에 들어찬 다니엘의 머리를 끄집어내야 했다.
여기에 머리를 받치고 힘을 빼세요.
벤은 최대한 거품을 내 다니엘의 머리를 감기고, 꼼꼼하게 얼굴을 씻긴 뒤 칫솔로 가볍게 양치질을 해주고는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해주었다. 다니엘은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서 턱에 크림을 묻히고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벤을 바라보았다. 벤은 내내 필요한 말 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는 인중부터 면도칼로 지저분한 수염을 깎고 있었다. 다니엘은 면도칼이 뺨을 지나 턱과 목으로 내려왔을 때 발버둥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럴 만한 힘이 없었고, 벤은 칼이 목에 닿을 때 더 단단하게 다니엘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니엘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대신 입을 열었다.
넌 뭐지? 꼬마야.
...이름을 알려드렸잖아요.
면도칼이 살을 비껴나가는 소리가 끝난 후에야 벤이 천천히 대답했다. 사실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니엘은 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답은 듣지 못할 것이고, 다니엘 또한 굳이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벤은 면도칼을 거둬 세면대 안에 넣고, 수건으로 다니엘의 턱을 깔끔하게 닦았다. 그리고 조금 지치고 피곤해보일 뿐, 멀쩡해진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다니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씻겨놓은 다니엘은 전혀 밤마다 10파운드에 몸을 파는 남창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벤은 다니엘의 직업을 또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저녁까지 먹인다면 다니엘의 얼굴에는 조금이라도 혈색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다니엘의 직업적 의식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벤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자신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고 말고는 별개의 것인 문제가 있었다. 벤이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랬다. 그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며, 스스로의 인정 없이도 막막한 일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사실 이미 그랬다. 벤은 그걸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울기 시작한 벤을 보고 당황했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던 벤을 조심스럽게 달랬고, 벤은 팔을 뻗어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아 아직 뜨거운 맨몸에다 숨을 뱉어댔다. 온종일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벤의 파자마가 거품에 젖어 들어갔다. 벤은 그러다 결국 제 마음을 토해냈다.
다니엘. 좋아해요. 다니엘.
다니엘은 움찔 떨었다. 뭐라 대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후 다니엘은 벤이 꺼내놓은 깨끗한 옷을 입고 식탁에서 벤의 음식을 먹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눌러 담았고, 약을 먹고 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벤은 자고 가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제 직업에 충실했다. 포주의 건물 근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그의 단골 한 명이 다니엘을 알아보았고, 다니엘은 최근 들어 가장 많은 돈을 받았다. 남자는 말끔한 얼굴과 몸에서 풍기는 좋은 냄새가 마음에 든 듯 다니엘을 안는 내내 매끈해진 턱과 머리카락에 연신 입을 맞췄고, 다니엘은 규칙적인 신음을 흘리며 플랫에 혼자 있는 벤을 생각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옆집에 사는 어린 이웃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의미 없이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일은 못 한 채, 다른 생각에 잠긴 채로. 다니엘은 자신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8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벤은 다니엘이 곧장 플랫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겨울의 늦은 해가 뜰 때 즈음에야 신발을 질질 끌며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벤이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바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니엘은 여전히 몸을 팔았고, 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고시생이었다. 벤은 공부를 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환멸에 몸서리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벤은 다니엘의 플랫 문을 다시 두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플랫에 돌아온 다니엘은 새로 불을 붙인 담배를 다 피운 뒤에야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벤이 두고 간 이불이 남아 있어서 다니엘은 다른 이불을 침대 밑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벤의 이불만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숨을 쉬었다. 벤의 냄새가 나고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좋아해요 다니엘’ 만약 거기에 대답을 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다니엘은 눈을 감았다.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에, 자신이 더 이상 좋을 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가치 없고 무력한 삶을 그의 인생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도 벤을 좋아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잠에 빠졌다.
책상에 엎어져서 자던 벤은 무심하게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집주인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플랫의 문을 열었을 때 벤은 눈이 오는 저녁과 두 개의 술병을 눈앞으로 들이미는 다니엘과 마주쳤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다니엘이 담배 연기를 날리며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 벤은 대답 대신 몸을 물려 그를 맞이했다.
크리스마스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TV도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도 방치해버린 터라 벤은 요즘의 날짜를 완전히 잊고 살고 있었다. 물론 이유의 대부분은 다니엘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다니엘은 침대 다리에 기대 앉아 벤에게 병을 건넸고, 멀뚱히 서 있는 이웃을 향해 크리스마스니까, 하고 짧게 언급한 뒤 먼저 목을 축였다. 벤은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안줏거리를 꺼내와 다니엘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잠시 후 벤은 집안 곳곳에 감춰두었던 술을 몽땅 꺼내게 되었다. 다니엘은 벤이 집 안에서 찾아내는 술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황당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고, 벤은 그 시선에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한 보험이 필요한 거라며 대꾸했다. 물론 그런 사태가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후 다니엘과 벤은 술을 마시고, 잠시 웃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다가 마침내 몸을 겹쳐 바닥으로 쓰러졌다. 벤이 먼저 입을 맞췄다. 다니엘은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벤의 까만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능숙하게 혀를 얽어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술에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니엘은 진심으로 벤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도 없어졌을 때, 두 사람은 다시 침대 다리에 기대 꼭 붙어 앉아있었다. 땀이 식자 침대 위의 이불을 끄집어내려 함께 몸을 덮었다. 벤이 난로를 사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 다니엘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고, 벤은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다니엘은 제 귀를 만져오는 벤의 손을 잡고,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어제들을 떠올렸다. 처음 몸을 팔던 날부터 자신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 따위는 없었다. 오늘은 어제였고, 어제가 내일이 될 터였으니까. 아니,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얘기였고, 다니엘은 이제 하루를 어떻게 보내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가 지금과 바뀌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벤은 언제까지나 고시생이고, 그와 자신이 언제나 플랫의 이웃 사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지금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다니엘은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통속적인 생각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간절하게.
벤.
...벤자민이요.
뭐?
벤자민 존 휘쇼.
그래, 벤자민.
..
메리 크리스마스.
다니엘도요.
다니엘과 벤은 오늘만큼은,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모든 것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술병이 즐비한 바닥에 누워 함께 잠들었다.
9
이변 따위는 없었다. 벤과 다니엘은 매일같이 얼굴을 보았고, 가끔 다니엘의 밤이 빌 때 몸을 섞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위는 변하지 않은 채, 현실도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니엘은 1월이 채 끝나기 전에 집세를 내지 못해 플랫에서 쫓겨났다. 첫 번째 변화였다. 벤은 그에게 제 집에 들어와 살라고 했으나 당연하게 거절당했다. ‘네 집에서 손님을 받아도 괜찮은가보군’ 벤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마치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다음날 다니엘은 사라졌다. 다니엘의 플랫에서 사라진 것은 다니엘뿐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치우지 않은 담배꽁초와 술병이 늘어져 있었고, 빨랫감과 낡아 헤진 옷은 한데 엉켜 있었다. 지저분한 침대도, 침침한 조명도 그대로였다. 없어진 것은 다니엘뿐이었다. 그러나 벤은 커튼도 없는 창문으로 해가 비쳐드는 플랫이 그렇게 휑해보였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어디로 갔는지 벤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므로 그는 얌전히 제 플랫에 돌아와 기계처럼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펼친 책에 눈을 댔지만 집중은커녕 다니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물고, 책을 흘깃 쳐다보며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었다. 그래서 벤은 책을 덮었다. 이미 벤에게, 공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 지저분한 플랫은 머지않아 집주인의 욕설과 함께 바닥과 벽, 천장만을 남기고 몽땅 비워졌다. 플랫은 보름쯤 비어 있다가 새로운 세입자를 맞았고, 벤의 새로운 플랫 이웃은 조용한 성격의 중년부부로 바뀌었다. 그들은 새벽마다 신음을 만들지 않았다. 새벽 세 시에 버릇처럼 벤이 이마를 대고 귀를 기울이면, 미약하게 들리는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그들이 만드는 소음의 고작이었다. 벤은 그렇게 다니엘이 없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벤의 하루는, 언젠가 그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듯 다시 틀에 박힌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느려터졌다고 생각되었어도 어쨌든 흘러가고 있었다.
다니엘의 시간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그는 벤보다 더 오래 살았고, 오랜 기간 동안 똑같은 일을 하며 지리한 시간에 무뎌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간도 착실하게 틀에 박혀 있었다. 새벽 내내 거리를 전전하다 방 하나를 잡고, 돈을 번 다음, 싸구려 모텔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잤다. 다니엘은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는 벤이 살던 플랫에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지만, 벤의 얼굴만 슬쩍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벤은 이미 플랫을 떠나버린 후였고, 그가 살던 곳에는 후줄근하고 지저분한 노총각이 혼자 살고 있었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던 기억 속의 플랫은 마치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났고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다니엘은 그 다짐마저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제 인생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그것은 겨울의 초입에 일어난 일이었다. 날씨가 조금 추워지기 시작하던, 가로수에 남은 잎이 점점 사라져가던. 다니엘은 여전히 다 낡아빠진 회색 반팔을 입고 쭈그려 앉은 채로, 담배를 물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오전 내내 부슬비가 내린 거리는 온통 젖어있었다. 살짝 패인 보도블럭 위로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물그림자도 간간히 비치고 있었다. 다니엘은 무료하게 그것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구두가 바로 그 옆에 멈춰 설 때까지.
고개를 들었을 때 다니엘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을 이미 몇 번 안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말끔한, 그래서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수트를 차려입은 벤이 손가락을 꼽으며 다니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벤을 바라보았다. 변화가 있었다면, 언제 그 존재감을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모를 심장이 조금씩 그 속도를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적응되지 못할 것처럼.
단골일수록 돈을 더 받는다면서요. 그래야 적당히 알아서 나가떨어진다고.
...
예외는 없어요?
대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멍하니 몸을 일으킨 것도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 움직임에 다니엘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저도 모르게 떨어뜨렸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변한 게 없네요.
...너는 많이 변했구나, 꼬마야.
생각 해봤는데,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
내가 변해서요. 당신을 사는 걸로요.
벤은 다니엘이 본 적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의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진 듯한 느낌마저 드는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다니엘은 언젠가의 자신을 떠올렸다. 누군가 자신을 길바닥에서 끄집어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던 언젠가의 자신을. 물론 오래지않아 박살났지만, 터무니없었던 만큼 간절했던 바람도. 다니엘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도저히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이라도 건네며 벤의 말에 대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만 떨었다. 잊었던 추위를 갑자기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잊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라도 한 것처럼.
같이 갈 거죠?
...
사실, 당신한테는 선택권 없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벤의 손을 잡았다. 처음 보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벤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니엘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이 어린 꼬마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동시에 또 다른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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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 시가 넘었을 때 벤은 평소처럼 침대에 누웠다. 언제나 그랬듯 그는 침대의 본래 크기가 무색할 만치 벽에 바싹 달라붙은 뒤, 차가운 벽의 온도가 이마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난로를 사라고 집에서 보내준 돈은 이미 술값과 책값으로 빠져나간 지 오래였지만 벤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삭막하고 좁은 플랫에 존재하는 열은 제 자신의 체온으로 충분하다고 벤은 생각했다.
벤 휘쇼의 생활은 칼같이 지켜지는 편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는 그의 하루는 공부와 식사, 잠을 거의 규칙적으로 실행하고 있었다. 다만 그는 남들보다 왜소한 체격 때문에 공부 시간의 조금을 산책이나 조깅에 할애했고, 가끔은 공부를 제쳐두고 친구들과의 일탈을 감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로, 대부분의 경우 그는 정말로 지정된 루트만을 돌고 돌며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 새벽 세 시에 잠들 때까지, 벤은 자신의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하루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써야할지 알았고, 으레 그렇게 행동해 온 것이다. 그렇게 고정되었던 ‘틀’에 지장이 가기 시작한 것은 나흘 전이었다. 그것은 벤이 잠드는 그 순간을 기점으로 어느새 시작되어 있었다.
벤은 미미한 소음에 귀를 틀어막았다. 새벽 세 시가 되어 칼같이 스탠드를 끄고 침대로 기어들어간 후 제 이불이 부스럭거리는 소음조차 멎어지면, 런던의 겨울 새벽은 일상의 누구라도 잠든 것처럼 조용해야 했다. 벤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 당연한 정적이 며칠 전부터 깨지고 있었다. 벽을 타고 들려오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사람의 소리가 그 주범이었다. TV소리, 사람의 웃음소리, 대화소리, 악다구니가 마구잡이로 뒤섞인 소음은 크지는 않았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벤의 입장에서는 확실히 제 수면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덕분에 요 나흘 간 그는 평소답지 않게 몇 번이나 책상 앞에서 졸고 말았다. 넓지 않은 침대의 크기를 온전히 누릴 수 있게 된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벤이 벽에 이마를 대고 잠을 자는 습관도 절로 사라졌다. 귀에 거슬리는 소리는 겨우 잠이 든 그를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깨우곤 했고, 벤은 베개 맡에 둔 휴대폰 액정의 시간을 확인한 후 욕지기를 내뱉고는 했다. 옆집의 소음이 벽을 타고 오는 것이 분명했다. 벤은 나직이 입술을 깨물며 내일은 반드시 그 사람을 만나 따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은 벤의 귓가에 굵고 얇은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 그 때였다. 미미하게 들려오는 TV 방청객의 웃음소리를 배경삼아, 소리를 죽이려는 노력조차 없이 적나라한 신음이 벽을 타고 그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벤은 순간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TV소리 위에 포르노 채널의 소리가 중첩된 것이라고. 그러나 이윽고 신음소리와 함께 몸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그의 귀를 파고들었다. 브라운관을 통해 들리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그리고 벤은 이 플랫에 세 들어 사는 이웃 중에 여자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단번에 잠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필요이상으로 적나라한 새벽의 소음이 시각적인 자극 없이도 그의 아랫도리를 뻐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도, 베개로 귀를 막아도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입술을 짓씹으며 내키지 않는 손을 파자마 밑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벤은 아침 일찍 거리를 뛰고 돌아와 굳은 얼굴로 플랫의 우편함 앞에 서 있었다. 제 이름이 적힌 우편함에 꽂혀있던 편지를 구겨 주머니에 넣고, 그 옆에 붙은 우편함에 쓰인 이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텅 비어있는 벤의 우편함과 달리 온갖 고지서와 전단지가 잔뜩 꽂힌 우편함의 주인은 제가 모르는 사람임에 분명했다. 벤은 인상을 찡그리며 낯선 이름을 발음해 보았다. 다니엘 크레이그. 그리고 플랫의 위층에서,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담배를 문 채로 계단을 내려오는 낯선 금발의 사내와 마주쳤다.
Hello.
Good morning.
푸른 눈의 남자와의 성의 없는 인사를 끝낸 후 벤은 계단에 발을 올리며 우선 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밤을 어떻게 보냈든 오늘의 일과는 지켜야 하는 것이 그 나름의 법칙이었던 탓이었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고 제 플랫의 문고리를 잡은 그 순간, 벤은 새벽 내내 귓가를 지배했던 신음의 한 가닥이 방금 지나친 남자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의 색이 옅은 머리카락과 무감하고 나른한 표정, 후줄근한 복장이 벤의 머릿속에 박혀들었다. 벤은 그가 여자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순식간에 온갖 잡념으로 가득 차버렸다.
당연하지만, 벤은 하루 종일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오는 새벽, 다니엘 크레이그가 사는 옆집에 갈 것을 결정했다.
2
벤은 의미 없이 쥐고 있던 펜을 결국 놓고는 앉은 채로 등만 돌려 침대가 있는 벽을 바라보았다. 온갖 것들을 적은 종이 낱장으로 다시 시선을 내렸을 때는 절로 한숨을 쉬며 종이를 구기고 싶었다. 무의식중에 현재 시간을 써놓은 것만 열 번이 넘었고, 그나마도 그 간격이 길지 않은 채였다. 결국 벤은 신경질적으로 펜을 책상 구석에 집어던지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차라리 잠이 왔으면 싶었지만 정신은 빌어먹게도 또렷해지고 있었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고 밤이 깊어올 때마다, 벤은 제 가슴이 지난 새벽만큼 쿵쿵 뛰어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결국 침대에 멍하니 앉아있기를 선택한 벤의 귀에 벽 너머의 소리가 들려온 것은 새벽 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고 있던 그는 저도 모르게 벽에 바싹 귀를 대고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해석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둔 채, 어느 시간에 가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고시생의 지위를 내밀며 새벽에 잠을 잘 수 없다 이야기할지, 공부를 할 수 없다 이야기할지 고민하던 벤의 귀에 어제와 같은 신음이 들린 게 그 때였다. 벤은 다른 생각 없이 침대를 박차고 나가 제 플랫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옆집 남자, 다니엘 크레이그의 문 앞에 서서 망설임 없이 문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더 안 받아.
잠시 시간이 지난 뒤, 느릿느릿 5cm쯤 열린 문의 틈새로 담배연기와 목소리만이 빠져나오더니 다시 쑥 들어가 버렸다. 벤은 잠시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생각하고는, 지체 없이 다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 오는 사람은 다 그런 목적인가보지. 벤은 이유 없이 쓰게 웃다가 다시 문이 열린 것을 보았다.
이미 손님이 있다고.
인상을 찡그린 남자는 여전히 담배를 물고, 흘러내려간 바지춤을 추스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로 문고리를 잡고 서 있었다. 벤은 눈앞의 남자가 아침에 보았던 반팔 티셔츠를 아직 입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저를 천천히 훑어 내리는 노골적인 파란 시선을 마주치다가 그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벤은 조용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제 위치를 각인시켰다. 저는 옆집에 사는 사람인데요. 그러자 남자는 담배 한 모금을 더 빨아들이더니 연기를 내뿜으며 되물었다.
아. 무슨 문제라도?
벤은 잠깐 황망하게 시선만 굴렸다. ‘당신이 새벽에 하는 섹스 때문에 일상에 지장이 왔습니다’라고 대놓고 말해도 될지를 가늠하던 차, 안쪽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누군데 그렇게 오래 걸려. 무시하고 빨리 와. 벤의 입술은 그 때 열렸다.
이웃끼리 긴히 꼭 상의해야 할 문제가 생겨서요. 이웃끼리만.
남자의 시선이 묘하게 비틀려 다시 벤의 몸을 훑어보았다. 벤은 남자가 ‘나중에’하고 제 요청을 거절한 뒤, 다음에 벤이 찾아올 때까지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무감한 목소리로 조금만 기다리라 말한 뒤 문을 닫았다. 잠시 후에 문이 열리고, 배가 나온 중년의 남자가 집 밖을 빠져나왔다. 벤은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를 무표정하게 마주보았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가, 결국 플랫의 계단을 뛰어 내려가고 말았다.
들어와.
실례하죠.
침침한 조명이 가장 먼저 벤의 눈에 들어왔다. 지저분하게 쌓여있는 옷가지들이 구석에 처박혀 있었고, 개수대의 설거지더미는 며칠째 물을 묻혀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벤은 침대에 앉아 다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내는 남자를 쳐다보았다. 그도 벤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얘기란 게..?
벤 휘쇼입니다.
이름을 알아야하나?
어쨌든 옆집 사이니까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를 내려다보며 벤은 주먹을 꾹 쥐었다 폈다. 매우 낮은, 그리고 조금 쉬어있는 남자의 목소리가 벤의 가슴을 쿵쿵 울리고 있었다. 새벽 내내 들어오던 그 목소리. 벤은 침을 한 번 삼키고 남자에게 말했다.
당신의 직업에 대해 왈가왈부 할 마음은 없지만, 제가 고시생이라 새벽까지 공부를 합니다.
음.
요 며칠간 당신의 ‘직업적 의식’ 때문에 제 생활에 지장이 생겼는데요.
그렇군. 사과하지.
다 피운 담배를 탁자에 아무렇게나 비벼 끄고, 남자는 두 무릎 사이로 팔을 축 늘어뜨린 후 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흥미 없는 목소리와 감정 없는 푸른 눈에 벤은 눈썹을 구겼다. 이런 대화로 이웃집 새벽의 소음이 개선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당사자로부터 이렇게 노골적으로 들을 것이라고도 생각지 못했다. 벤은 이마를 짚으며 그를 향해 말했다.
사과. 만 하시는 건가요.
뭘 더 바라지? 네가 말한 그 ‘직업적 의식’이 있어야 내가 밥을 먹고 사는데. 그쪽도 먹고 살려고 공부하는 것 아닌가.
잠깐만요.
할 말이 끝났으면 돌아갔으면 좋겠군. 배웅은 생략하지.
그리고 담배에 불을 붙여 다시 입에 물고, 여태 열린 채인 바지춤 사이로 손을 넣는 남자였다. 벤은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그런 남자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전혀 흥분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는 제 것을 스스로 쥐고 문지르고 있었다. 남자의 목소리가 굳은 벤을 쿡 찔러왔다.
네가 내쫓아서 돈도 못 받았잖아.
...
아니면 뭐야, 너도 나와 하려고 여기 온 건가?
...뭐요?
벤은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제 바지춤에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망히 내린 시선에, 자신의 트레이닝 바지의 앞섬이 불룩하게 일어서있는 것이 보였다. 벤은 복잡한 시선으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제 손에 파정하고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는 남자는 티슈 한 장에 손을 닦은 뒤 벤의 발 앞으로 떨어뜨리며 다시 담배를 깊이 빨았다. 그리고 벤의 얼굴과 바지춤을 번갈아보다가 피식 웃었다. 낮고 쉰 목소리가 벤을 향해 떨어졌다.
내 하룻밤은 10파운드짜리다. 살 거냐? 옆집 고시생 꼬마야.
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3
10파운드짜리의 욕정 분출 대상이 되는 느낌을 벤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10파운드를 주고 누구를 사는 상상은, 그가 하고 있는 공부와 관계없이 우스우리만치 쉽게 할 수 있었다. 벤은 자기보다 스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남자를 여전히 말없이 바라보며 그의 뒤에 제 것을 박아 넣는 그림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다니엘은 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혹은 어떤 것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담배를 빨아대며 웃고 있었다.
불편해 보이는군.
...
도와줄까?
벤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시늉을 하는 다니엘을 보며 기겁하고 발을 물렸다. 엉거주춤 일으킨 몸을 다시 풀썩 침대로 앉히며 다니엘은 시시한 듯 숨을 훅 내뱉었다. 벤은 꼴사나운 아래를 가리려는 마땅한 방법도 찾지 못한 채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최대한, 그 자신을 납득시키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난, 그런 사람 아니에요.
...그래?
여전히 제 아랫도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런 것 치고는 따로 놀지 않느냐는 다니엘의 물음에 벤은 눈을 꾹 감았다. 자신을 방해하던 벽 너머의 이웃은, 이제 대놓고 자신을 팔며 벤을 그의 ‘직업적 의식’에 참여하게끔 유도하고 있었다. 손바닥에 배어나는 땀을 바지에 문질러대다 벤은 다시 다니엘을 쳐다보았다. 어쩔 줄을 모르는 자신을 대놓고 비웃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벽에는, 주의 해주세요.
차라리 그 시간이 되기 전에 일찍 자는 게 어때, 꼬마야.
담배 연기가 다시 다니엘의 마른 입술 사이에서 뿜어져 나왔다. 벤은 입을 꾹 다물고 더 이상의 대꾸 없이 다니엘의 플랫을 빠져나왔다. 다섯 발자국도 못 가 제 플랫에 돌아왔을 때 벤은 벽 너머에서 기묘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소리를 들으며 침대다리에 기대 무너지듯 주저앉아 억지로 자위하는 동안 10파운드짜리 남창 때문에 흥분한 자신을 저주하며 피가 맺힐 정도로 입술을 씹어댔다. 그리고 24시간 만에 꼭 같은 이유로 뱉어낸 정액이 묻은 휴지를 구석으로 던져버린 뒤, 일주일간 차곡차곡 쌓인 피로에 눌려 그 모습 그대로 잠들었다. 그 밤 벤의 꿈은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냈다. 꿈이 이어지는 몇 시간 내내 벤은 옆집에 사는 나이 많은 남창과 지칠 때까지 섹스 했고, 그 비용으로 10파운드를 던지고 있었다.
거의 무용지물인 휴대폰의 진동 소리에 벤은 눈을 떴다. 플랫 안은 어두웠고 불편한 자세로 잠든 몸은 굳은 채 삐걱댔으며 바지춤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을 확인하자마자 벤은 팔로 제 머리를 아프게 감싸고 무릎에 이마를 쿵쿵 찧어댔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옆집에 사는 이웃 남자가 단 하나의 가능성이었고 대답이었다. 다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벤은 팔만 위로 뻗어 침대 위에서 휴대폰을 끌어내려 액정을 쳐다보았다. 보고 싶지 않은 단어가 떠올라 있었고, 그래서 그는 새벽에 휴지를 던진 곳을 향해 제 휴대폰도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그리고 10분 뒤, 다니엘은 플랫의 문을 열고 벤을 마주했다.
4
다니엘은 굳은 표정의 벤이 제 플랫의 문을 두드리고 집 안에 멋대로 들어오는 것을 묵인했다. 벤과 자신이 이렇게 자주 볼 사이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지만, 벤 때문에 이틀 동안 밥벌이를 못 하겠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그는 그냥 문을 닫고 담배만 한 모금 깊이 빨아들일 뿐이었다. 그는 원래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공부를 한다는 이웃 꼬마가 하루만에 마음을 바꿔 제 집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인지 따위는 궁금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벤이 오늘의 밤 상대가 될지 말지만을 가늠하며 짓이겨진 담배로 가득한 탁자에서 술병을 집어 들었다. 벤은 침대 앞에서 몸을 돌려 다니엘을 바라보았다. 그의 티셔츠는 어제와 다른 것이었지만 잔뜩 구겨지고 더러운 것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것이 없었다.
또 내가 공부에 방해가 됐나?
싸구려 술을 한 모금 삼키고 곧장 담배를 입에 대는 다니엘을 보며 벤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벤은 다니엘과 섹스를 해본 것도,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니엘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벤의 일상을 삽시간에 망가뜨리고 우선순위를 달리하며, 벤이 결국 스스로 제 말을 번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벤은 그것이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제 변덕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침대에 누워 벽을 통해 들리는 소음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선택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벤은 침대에 앉아 제 앞에 서있는 다니엘을 올려다보았다. 꼭 하루 전 다니엘이 자신을 쳐다보던 것과 같은 모습으로.
..뭐지?
당신을 사러 왔는데요.
다니엘은, 재차 말하지만, 벤이 무슨 마음으로 제 집에 들어온 것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고한 척 ‘그런 사람’이 아니라던 말을 하루도 못 가 바꿔버린 애송이를 조금 비웃고 말았을 뿐이다. 그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술을 마저 비워내고 담배를 문 채 벤을 내려다보았다. 부자연스럽게 얼어있는 벤의 표정은 다니엘이 신경 쓸 부분이 아니었다. 새파란 눈으로 벤의 초록색 눈을 마주보다, 다니엘은 벤의 머리를 헝클이며 씩 웃었다. 담배 끝을 잘근 씹다 아무렇게나 퉤 뱉어버린 뒤, 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바지춤을 열며 낮게 중얼댔다.
두 번째부터는 20파운드다. 꼬마야.
벤은 제 바지 사이로 들어오는 거친 손가락에 순간 몸을 움츠렸다. 속옷이 벗겨지고 다니엘의 혀가 끝에 닿아 능숙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벤은 다니엘과의 행위를 통해 일상을 제자리로 돌려놓겠다는 합리화를 스스로에게 시킬 예정이었다. 옳지 못한 방법이나 이것을 통해 전처럼 틀에 박힌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시작과 동시에 완전히 부서지고 있었다. 다니엘이 벤의 일상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과 꼭 같은 속도로.
벤은 처음이었고, 다니엘은 익숙했기에 다니엘은 벤이 어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섹스를 하는 내내 알려주었다. 요령 없이 힘만 주며 박아대는 사람을 다루는 것은 다니엘에게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다니엘은 근육을 조이고 풀며 흔들렸고 스팟을 스스로 찧으며 타이밍을 조절했다. 그러다가 제 위에 올라탄 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막내 동생에게 성교육을 시키는 형이 된 것 같다는 말도 안 되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숨을 몰아쉬는 벤이 제 안에 파정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고, 늘 그랬듯 딱히 느끼지 못했을 제 것을 직접 풀어주기 위해 손을 올렸을 때 자신이 사정했다는 것까지 알아챘다. 그건 다니엘로서는 딱히 원하지 않던 일이었다. 바라던 것이 잘 되지 않은 것을 볼 때의 느낌과도 비슷한 감정으로.
그래서 다니엘은 제 위에 널브러진 벤의 몸을 치우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뜨거운 체온에 몸을 겹친 채 결국 잠에 빠지는 옆집의 어린 애송이를 향한 감정이 끝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일부는 성가심이었고, 일부는 씁쓸함이었다. 침대에 늘어진 벤의 등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다니엘은 새 담배에 불을 붙여 동이 터올 때까지 뜬 눈으로 밤을 새며 침묵했다.
5
동이 터올 무렵 침대 밑에서 잠이 든 다니엘은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느릿하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푸른 눈은 어깨까지 둘러진 이불을 발견했다. 다니엘은 소리의 출처로 고개만 돌려 싱크대 앞에 서 있는 벤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젯밤 벗었던 셔츠와 바지를 다시 주워 입은 채, 까치머리의 옆집 고시생은 옆집 남창의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주제넘은 행동에 다니엘은 인상을 찌푸렸지만 차마 대놓고 그만두라는 소리는 할 수 없었다. 벤은 다니엘이 탁자 위로 손을 뻗어 담뱃갑을 쥐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다니엘이 일어난 것을 확인했다. 남은 접시의 거품을 헹궈 건조대 위에 쌓아놓은 뒤, 손에서 물을 털고 다니엘의 앞으로 다가갔다. 다니엘은 멍하니 벤의 자취를 좇고 있었다. 벤의 맨발이 다니엘의 이불 앞에 멈춰 섰을 때, 다니엘은 벤에게 쓸 데 없는 짓은 관두고 그냥 집으로 가버리라고 말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벤이 이불 위로 떨어뜨린 꾸깃한 10파운드를 보았을 때 저도 모르게 뱉지도 못한 말을 삼켰고, 아주 잠시나마 자신이 어떤 종류의 착각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10파운드짜리 밤은 이미 끝나 있었다. 옆집에 사는 애송이는 그가 말한 대로 다니엘을 사러 왔었던 것뿐이었다. 다니엘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갈게요. 밥 사드세요.
다니엘은 바닥에 앉은 채로 플랫을 나서는 벤의 발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두 번째로 들렸을 때에야 10파운드를 집어 제 눈앞까지 끌어올렸다. 구김이 가득한 지폐를 보며 다니엘은 피식 웃었고, 담배에 불을 붙여 깊게 폐로 연기를 삼키기 시작했다. 이건 밥값이 아니라 몸값이었다. 벤 휘쇼의 합리화는 그 자신에게도, 다니엘에게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벤 또한 그럴 것이다. 지난밤의 대가를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은 후, 다니엘은 이불을 침대 위로 치우고 화장실로 향했다. 찬물에 치를 떨며 죽은 정액을 긁어내고, 화장실에서 나와 반팔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플랫을 나섰다. 벤이 준 10파운드는 담배 값이 되었다. 다니엘은 벤이 이해할 것이라 생각했다.
벤은 책상에 앉아 책을 편 채로 멍하니 앉아 있었다. 어쩐지 조금 낯설어진 것 같은 책상에 앉은 채, 그는 당연하게도 다니엘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침에 다니엘의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벤은 다니엘과의 섹스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갖은 문제 중 어떠한 종류로도 해답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너무도 쉽게 제 뒤를 내주는, 벽 너머로만 듣던 신음을 날것 그대로 들려주는 다니엘을 안으며, 벤은 사실상 평범한 고시생이었던 자신의 일상을 포기했다. 되찾기는커녕 제 스스로 더 꼬아버렸고, 발끝을 물들인 진창에 온몸까지 푹 적셔졌다. 그의 문제는 이제 어떻게 일상을 되찾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일상을 이을 것인가로 바뀌었다. 이날 이후로도 벤은 공부를 하고 다니엘은 그의 집으로 손님을 받을 것이며, 두 사람은 플랫의 이웃 사이일 터였다.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꼭 어제의 자신처럼 침대 밑에서 잠든 다니엘을 보았을 때, 벤은 순간 그가 죽은 줄 알았다. 주위에 떨어져있는 헤아리기도 힘든 담배꽁초를 발로 쓸어버리고, 여태 제가 덮고 있었던 이불을 그에게 덮어주었다. 위생상태가 의심스러운 침대 시트와 이불은 커튼도 없는 플랫의 창문 밖에서 그대로 들어오는 햇빛에 그 실체를 드러냈다. 칙칙한 플랫에서, 다니엘의 금색 머리카락만이 어울리지 않게 빛났다. 벤은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머리카락에 손을 뻗을 뻔했다.
거기까지 떠올리던 벤은 의미 없이 쥐고 있던 펜으로 의미 없이 종이에 이름을 썼다. 손가락이 제멋대로 움직였으니 어떤 이름을 썼는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벤은 다니엘이 제 돈으로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했다. 무감한 얼굴, 흡사 거지같은 꼴로 감자튀김을 먹는 모습을. 벤은 물론 그것이 가능성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억지로 책에 눈을 붙이며 다니엘을 머릿속에서 밀어내려 노력했다. 노력은 노력으로만 그쳐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지는 않았지만, 시간만큼은 어쨌든 흘러갔다.
그 새벽에는 벽을 넘어 들리는 소음이 없었다. 새벽 세 시에 벤은 다니엘의 플랫 문을 두드렸고, 잠기지도 않은 문을 열었을 때 어둠에 묻혀있는 텅 빈 플랫과 마주쳤다. 다니엘이 아침에는 돌아와 있을까, 벤은 자신이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제 플랫으로 들어와 오랜만에 벽에 이마를 붙인 채로 눈을 감으며, 어쩌면 최근의 문제에 대한 대답을 찾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들었다.
6
벤은 새벽 내내 뒤척였다. 바람소리와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는 그 새벽 내내 계단을 밟는 소리, 옆집의 플랫 문이 열리는 소리로 둔갑했다. 신경 쓰지 않으려 노력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있었다. 캄캄한 방 안에서 눈을 뜰 때마다 벤은 머리를 헝클였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귀를 막았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벽에 닿는 이마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다니엘이 집으로 돌아온 것은 오전 열 시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벤의 알람시계였던 휴대폰은 배터리가 분리된 채로 플랫의 구석에 처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늦은 시간까지 침대를 빠져나오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벤은 다니엘의 플랫 문이 열리는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챘고, 문이 닫힘과 동시에 벌떡 일어나 현관으로 달려갔다. 스스로조차 자신이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지만 벤은 문을 열었고, 맨발로 복도를 뛰어 다니엘의 플랫 문을 열었다. 노크는 생략했다. 벤은 반팔 차림의 다니엘이 매우 지친 표정으로 현관을, 저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뭐야.
어제 안 들어왔던데요.
너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지.
다니엘은 낮고, 여전히 조금 쉰 목소리로 조용히 대꾸했다. 그리고 벤의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잔뜩 헝클어진 머리와 파자마 차림, 맨발의 꼬마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꼬마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침대로 걸음을 옮기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내가, 못 자서 그러는데. 나가주겠어?
벤은 다니엘이 주머니에서 새 담뱃갑을 꺼내 뜯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직감적으로 그것이 제가 주었던 돈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다니엘은 가스가 거의 없는 싸구려 라이터로 몇 번이나 불을 붙였고, 겨우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었다. 벤은 다니엘이 떨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한겨울에 반팔을 입고 나돌아 다닌 사람이 멀쩡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추웠나 봐요.
눈이 왔지.
밖에 있었어요?
지나다니는 손님을 잡아야 했거든.
말을 하는 동안 다니엘은 침대에 앉았고, 담배를 입에 문 채 무릎 사이로 두 팔을 늘어뜨렸다. 벤은 다니엘의 무감한 표정과 행동이, 노골적으로 제 직업적 위치를 드러내는 언사가 조금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개가 숙여져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벤은 다니엘의 손질되지 않은 지저분한 금발과, 입술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연기만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렇게 신경 쓸 이유가 없는데. 벤은 그의 고민이, 답 없는 질문이 다니엘의 집에 들이닥친 것과 동시에 다시 시작되었음을 깨달았다. 벤은 다니엘의 드러난 팔뚝에 눈을 고정시킨 채 입을 열었다. 금방이라도 팔이 제멋대로 뻗어나가 다니엘의 팔을 잡을 것만 같았다.
..돈은 벌었나요?
런던의 눈은 가족애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더군.
건물 앞에 쭈그려 앉아 눈을 맞으며, 다니엘은 케이크며 선물상자를 들고 귀가하는 사람을 몇 명이나 보았다. 그들을 비웃고 싶었지만, 그것이 결국 제 자신에 대한 경멸과 조소로 끝날 것이라는 것을 다니엘은 알고 있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가정이 있는 사람들에게 질투하지 않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왔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무언가에 대해 흠을 잡아 깎아내리는 것이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다니엘은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쓸데없는 감정으로 제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이야말로 가장 귀찮은 일이었다.
밤을 새고도 돈을 벌지 못하는 것은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눈길조차 받지 못한 밤과 새벽이 조금 추웠을 뿐이다. 순간 지난 시간동안 축적된 추위가 갑자기 밀려오는 것 같아 다니엘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떨리는 손가락은 결국 반도 태우지 못한 담배를 침대 시트에 비벼 껐고, 그마저도 아까운 듯 남은 꽁초를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벤은 그 구질구질한 광경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병신 같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는 다니엘의 팔을 그래서 결국 부여잡았다. 몇 시간이나 바깥에서 얼어있어야 했을 팔은 뜨거웠다. 벤은 반사적으로 다니엘의 얼굴에도 손을 올렸다.
가, 이제.
..뜨겁잖아.
내버려둬.
당신 죽고 싶어요? 환장했어?
다니엘은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무거운 눈을 껌벅대며 벤 휘쇼의 진짜 직업은 고시생이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 떠올렸다. 잘은 모르지만, 정말 급한 고시생이라면 옆집에 누가 살든, 설사 그가 남창이더라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벤이 자신과 함께 했던 하룻밤은 그 사실을 깨닫기 위한 것이었다고. 잠들어버린 벤의 옆에서 다니엘이 새벽 내내 생각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귀찮은 것을 싫어하지만 자꾸 떠올랐던, 어처구니없을 만큼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다니엘은 이제 정말로 자고 싶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죽은 듯이 잘 준비를 마쳤다. 그리고 자신이 혹시 정말로 아픈 거라면, 그의 플랫 이웃인 벤 휘쇼가 자신을 간호할 것이라 확신했다. 이후 벤의 행동은 그의 예상과 꼭 맞아떨어졌다.
7
벤은 다니엘의 낡고 더러운 신발을 벗기고 침대 위로 똑바로 눕혔다. 다니엘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고, 딱히 간병이란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벤은 발만 동동 굴렀다. 다니엘의 플랫에 깨끗한 수건이 없었기 때문에 벤은 제 플랫에서 새 수건과 언젠가 사놓았던 감기약을 챙겼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찬물밖에 나오지 않는 수돗물을 받아 다니엘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찬 수건이 닿을 때마다 다니엘은 움찔거리며 몸을 떨었지만 벤은 집요하게 다니엘의 온몸을 닦아주었다. 벤의 목적은 그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이었지만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벤은 아픈 사람을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픈 사람이 다니엘이었기 때문에 외면할 수가 없었다.
벤은 제 플랫에 있는 이불을 가져와 다니엘에게 덮어주었고, 장을 봐 두었던 재료로 다니엘을 위해 음식을 만들었다. 가장 큰 옷을 찾아 책상 위에 올려놓았고, 다시 옆집으로 돌아가 다니엘의 열을 내리는데 주력했다. 저도 모르는 새 약을 삼키고 땀을 흘리며 잠을 자던 다니엘은 저녁 무렵에야 눈을 떴다. 벤은 침침한 플랫의 조명 밑에서 다시 다니엘의 푸른 눈을 보았고, 그제야 한숨을 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다니엘은 말없이 눈알만 굴려 갑갑하리만치 둘러싸인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벤은 또 제 하루가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는 것을 애써 담담하게 인정하고 있었다.
씻고 밥 먹는 게 좋겠어요. 여기는 따뜻한 물이 안 나오니까 저희 집으로 가요.
...
저녁도 해 놨으니까 그거 먹고 약 먹으면 괜찮을 거예요.
..싫어.
당신은 거부권 없어요.
벤은 수건을 뗀 다니엘의 이마에 손등을 올려보았다. 여전히 열이 있었지만 펄펄 끓던 정도는 아니었다. 다니엘은 제 말이 모두 묵살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얌전히 벤의 집으로, 거의 기다시피 도착해 욕실 안으로 들어섰다. 땀에 전 옷을 벗자마자 다니엘은 다시 덜덜 떨었고, 벤은 그를 좁은 욕조에 구겨 넣고 뜨거운 물을 틀었다. 뜨거운 물의 온도가 다니엘에게는 낯설었다. 목까지 차오르고 멈춰버린 물을 천천히 손바닥으로 만져보다가 다니엘은 온 힘을 다해 머리끝까지 물속으로 집어넣었다. 칫솔을 찾아 욕실로 돌아온 벤은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물속에 들어찬 다니엘의 머리를 끄집어내야 했다.
여기에 머리를 받치고 힘을 빼세요.
벤은 최대한 거품을 내 다니엘의 머리를 감기고, 꼼꼼하게 얼굴을 씻긴 뒤 칫솔로 가볍게 양치질을 해주고는 일회용 면도기로 면도를 해주었다. 다니엘은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서 턱에 크림을 묻히고 진지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벤을 바라보았다. 벤은 내내 필요한 말 외에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였다. 그는 인중부터 면도칼로 지저분한 수염을 깎고 있었다. 다니엘은 면도칼이 뺨을 지나 턱과 목으로 내려왔을 때 발버둥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 그럴 만한 힘이 없었고, 벤은 칼이 목에 닿을 때 더 단단하게 다니엘의 어깨를 짓눌렀다. 다니엘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대신 입을 열었다.
넌 뭐지? 꼬마야.
...이름을 알려드렸잖아요.
면도칼이 살을 비껴나가는 소리가 끝난 후에야 벤이 천천히 대답했다. 사실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다니엘은 벤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궁금했다. 하지만 답은 듣지 못할 것이고, 다니엘 또한 굳이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벤은 면도칼을 거둬 세면대 안에 넣고, 수건으로 다니엘의 턱을 깔끔하게 닦았다. 그리고 조금 지치고 피곤해보일 뿐, 멀쩡해진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다니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씻겨놓은 다니엘은 전혀 밤마다 10파운드에 몸을 파는 남창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더욱, 벤은 다니엘의 직업을 또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저녁까지 먹인다면 다니엘의 얼굴에는 조금이라도 혈색이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다니엘의 직업적 의식에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 벤은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자신이 그걸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고 말고는 별개의 것인 문제가 있었다. 벤이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것이 그랬다. 그건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며, 스스로의 인정 없이도 막막한 일상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사실 이미 그랬다. 벤은 그걸 알고 있었다.
다니엘은 갑자기 울기 시작한 벤을 보고 당황했다. 욕조에서 몸을 일으켜 바닥에 쭈그려 앉아있던 벤을 조심스럽게 달랬고, 벤은 팔을 뻗어 다니엘의 목을 끌어안아 아직 뜨거운 맨몸에다 숨을 뱉어댔다. 온종일 갈아입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벤의 파자마가 거품에 젖어 들어갔다. 벤은 그러다 결국 제 마음을 토해냈다.
다니엘. 좋아해요. 다니엘.
다니엘은 움찔 떨었다. 뭐라 대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잠시 후 다니엘은 벤이 꺼내놓은 깨끗한 옷을 입고 식탁에서 벤의 음식을 먹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그는 최대한 눌러 담았고, 약을 먹고 제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벤은 자고 가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그리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 제 직업에 충실했다. 포주의 건물 근처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을 때 그의 단골 한 명이 다니엘을 알아보았고, 다니엘은 최근 들어 가장 많은 돈을 받았다. 남자는 말끔한 얼굴과 몸에서 풍기는 좋은 냄새가 마음에 든 듯 다니엘을 안는 내내 매끈해진 턱과 머리카락에 연신 입을 맞췄고, 다니엘은 규칙적인 신음을 흘리며 플랫에 혼자 있는 벤을 생각했다. 그의 상상 속에서 옆집에 사는 어린 이웃은 멍하니 의자에 앉아 의미 없이 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일은 못 한 채, 다른 생각에 잠긴 채로. 다니엘은 자신도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8
달라지는 것이 없다는 것은 기정사실이었다. 벤은 다니엘이 곧장 플랫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겨울의 늦은 해가 뜰 때 즈음에야 신발을 질질 끌며 느린 걸음으로 들어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벤이 다니엘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 무언가가 바뀔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니엘은 여전히 몸을 팔았고, 벤은 여전히 아무것도 아닌 고시생이었다. 벤은 공부를 할 때도 느끼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환멸에 몸서리쳤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벤은 다니엘의 플랫 문을 다시 두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플랫에 돌아온 다니엘은 새로 불을 붙인 담배를 다 피운 뒤에야 침대 위에 드러누웠다. 벤이 두고 간 이불이 남아 있어서 다니엘은 다른 이불을 침대 밑으로 걷어냈다. 그리고 벤의 이불만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그 안에서 숨을 쉬었다. 벤의 냄새가 나고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좋아해요 다니엘’ 만약 거기에 대답을 했다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다니엘은 눈을 감았다. 과거를 가정하는 것은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벤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그 말에, 자신이 더 이상 좋을 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다. 벤에게 피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가치 없고 무력한 삶을 그의 인생에 포함시키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도 벤을 좋아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그는 잠에 빠졌다.
책상에 엎어져서 자던 벤은 무심하게 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집주인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플랫의 문을 열었을 때 벤은 눈이 오는 저녁과 두 개의 술병을 눈앞으로 들이미는 다니엘과 마주쳤다. 멍하니 그를 쳐다보자 다니엘이 담배 연기를 날리며 말했다. 들어가도 될까. 벤은 대답 대신 몸을 물려 그를 맞이했다.
크리스마스라는 걸 까먹고 있었다. TV도 컴퓨터도 없고, 휴대폰도 방치해버린 터라 벤은 요즘의 날짜를 완전히 잊고 살고 있었다. 물론 이유의 대부분은 다니엘이었다. 집안으로 들어온 다니엘은 침대 다리에 기대 앉아 벤에게 병을 건넸고, 멀뚱히 서 있는 이웃을 향해 크리스마스니까, 하고 짧게 언급한 뒤 먼저 목을 축였다. 벤은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안줏거리를 꺼내와 다니엘의 옆에 붙어 앉았다. 그리고 술을 마셨다. 한동안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지만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잠시 후 벤은 집안 곳곳에 감춰두었던 술을 몽땅 꺼내게 되었다. 다니엘은 벤이 집 안에서 찾아내는 술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황당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고, 벤은 그 시선에 혹시 모르는 사태를 대비한 보험이 필요한 거라며 대꾸했다. 물론 그런 사태가 크리스마스는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 후 다니엘과 벤은 술을 마시고, 잠시 웃고,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다가 마침내 몸을 겹쳐 바닥으로 쓰러졌다. 벤이 먼저 입을 맞췄다. 다니엘은 거부하지 않았다. 대신 벤의 까만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능숙하게 혀를 얽어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섞었다. 술에 취해 발갛게 달아오른 벤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다니엘은 진심으로 벤을 위해 모든 것을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으니까.
몇 번이나 했는지 셀 수도 없어졌을 때, 두 사람은 다시 침대 다리에 기대 꼭 붙어 앉아있었다. 땀이 식자 침대 위의 이불을 끄집어내려 함께 몸을 덮었다. 벤이 난로를 사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을 때 다니엘은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고, 벤은 어깨에 닿은 머리카락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다니엘은 제 귀를 만져오는 벤의 손을 잡고,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었던 어제들을 떠올렸다. 처음 몸을 팔던 날부터 자신에게 미래에 대한 기대 따위는 없었다. 오늘은 어제였고, 어제가 내일이 될 터였으니까. 아니,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오래전 얘기였고, 다니엘은 이제 하루를 어떻게 보내든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가 지금과 바뀌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벤은 언제까지나 고시생이고, 그와 자신이 언제나 플랫의 이웃 사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게 지금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다니엘은 순간이 영원하기를 바란다는 통속적인 생각을 자신이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도, 이렇게나 간절하게.
벤.
...벤자민이요.
뭐?
벤자민 존 휘쇼.
그래, 벤자민.
..
메리 크리스마스.
다니엘도요.
다니엘과 벤은 오늘만큼은, 크리스마스라는 것이 모든 것의 이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로를 꼭 끌어안고 술병이 즐비한 바닥에 누워 함께 잠들었다.
9
이변 따위는 없었다. 벤과 다니엘은 매일같이 얼굴을 보았고, 가끔 다니엘의 밤이 빌 때 몸을 섞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위는 변하지 않은 채, 현실도 변하지 않은 채 지속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다니엘은 1월이 채 끝나기 전에 집세를 내지 못해 플랫에서 쫓겨났다. 첫 번째 변화였다. 벤은 그에게 제 집에 들어와 살라고 했으나 당연하게 거절당했다. ‘네 집에서 손님을 받아도 괜찮은가보군’ 벤은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마치 그래야 했던 것처럼 다음날 다니엘은 사라졌다. 다니엘의 플랫에서 사라진 것은 다니엘뿐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여전히 치우지 않은 담배꽁초와 술병이 늘어져 있었고, 빨랫감과 낡아 헤진 옷은 한데 엉켜 있었다. 지저분한 침대도, 침침한 조명도 그대로였다. 없어진 것은 다니엘뿐이었다. 그러나 벤은 커튼도 없는 창문으로 해가 비쳐드는 플랫이 그렇게 휑해보였던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가 어디로 갔는지 벤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므로 그는 얌전히 제 플랫에 돌아와 기계처럼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펼친 책에 눈을 댔지만 집중은커녕 다니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여전히 담배를 물고, 책을 흘깃 쳐다보며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었다. 그래서 벤은 책을 덮었다. 이미 벤에게, 공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 지저분한 플랫은 머지않아 집주인의 욕설과 함께 바닥과 벽, 천장만을 남기고 몽땅 비워졌다. 플랫은 보름쯤 비어 있다가 새로운 세입자를 맞았고, 벤의 새로운 플랫 이웃은 조용한 성격의 중년부부로 바뀌었다. 그들은 새벽마다 신음을 만들지 않았다. 새벽 세 시에 버릇처럼 벤이 이마를 대고 귀를 기울이면, 미약하게 들리는 남편의 코고는 소리가 그들이 만드는 소음의 고작이었다. 벤은 그렇게 다니엘이 없던 일상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벤의 하루는, 언젠가 그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듯 다시 틀에 박힌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었다.
그의 시간은 느려터졌다고 생각되었어도 어쨌든 흘러가고 있었다.
다니엘의 시간도 다를 것은 없었다. 다만 그는 벤보다 더 오래 살았고, 오랜 기간 동안 똑같은 일을 하며 지리한 시간에 무뎌지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시간도 착실하게 틀에 박혀 있었다. 새벽 내내 거리를 전전하다 방 하나를 잡고, 돈을 번 다음, 싸구려 모텔에서 오전 내내 잠을 잤다. 다니엘은 변화를 바라지 않았다. 그래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는 벤이 살던 플랫에 찾아가본 적이 있었다. 어울리지 않지만, 벤의 얼굴만 슬쩍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벤은 이미 플랫을 떠나버린 후였고, 그가 살던 곳에는 후줄근하고 지저분한 노총각이 혼자 살고 있었다. 깔끔하고 정돈되어있던 기억 속의 플랫은 마치 거짓말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 말 없이 그곳을 떠났고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다니엘은 그 다짐마저도 사치라고 생각했다. 제 인생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그리고 그것은 겨울의 초입에 일어난 일이었다. 날씨가 조금 추워지기 시작하던, 가로수에 남은 잎이 점점 사라져가던. 다니엘은 여전히 다 낡아빠진 회색 반팔을 입고 쭈그려 앉은 채로, 담배를 물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오전 내내 부슬비가 내린 거리는 온통 젖어있었다. 살짝 패인 보도블럭 위로는 빗물이 고여 있었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물그림자도 간간히 비치고 있었다. 다니엘은 무료하게 그것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군가의 구두가 바로 그 옆에 멈춰 설 때까지.
고개를 들었을 때 다니엘은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신을 이미 몇 번 안았던 기억이 있는데요.
말끔한, 그래서 조금은 어색해 보이는 수트를 차려입은 벤이 손가락을 꼽으며 다니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니엘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로 벤을 바라보았다. 변화가 있었다면, 언제 그 존재감을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모를 심장이 조금씩 그 속도를 달리했다는 것이었다. 생경한 느낌이었다. 적응되지 못할 것처럼.
단골일수록 돈을 더 받는다면서요. 그래야 적당히 알아서 나가떨어진다고.
...
예외는 없어요?
대꾸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멍하니 몸을 일으킨 것도 다행이라고 여겨질 만큼. 그 움직임에 다니엘은 입에 물었던 담배를 저도 모르게 떨어뜨렸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은 변한 게 없네요.
...너는 많이 변했구나, 꼬마야.
생각 해봤는데, 방법은 그것밖에 없는 것 같아서.
...
내가 변해서요. 당신을 사는 걸로요.
벤은 다니엘이 본 적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가 하는 말의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마치 아이가 원하는 것을 가진 듯한 느낌마저 드는 웃음이었다. 그 얼굴을 보며 다니엘은 언젠가의 자신을 떠올렸다. 누군가 자신을 길바닥에서 끄집어줄 날이 올 것이라 믿었던 언젠가의 자신을. 물론 오래지않아 박살났지만, 터무니없었던 만큼 간절했던 바람도. 다니엘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도저히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이라도 건네며 벤의 말에 대꾸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만 떨었다. 잊었던 추위를 갑자기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혹은 잊었던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라도 한 것처럼.
같이 갈 거죠?
...
사실, 당신한테는 선택권 없어요.
그래서 다니엘은 벤의 손을 잡았다. 처음 보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벤을 거부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다니엘은 제 손을 잡고 있는 이 어린 꼬마를, 줄곧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동시에 또 다른 변화였다.


존좋ㅠㅠㅠㅠㅠㅠ
답글삭제ㅠㅠㅠㅠㅠㅠㅠㅠㅠ존나 좋다ㅏ....슨상님
답글삭제미친존좋이다ㅠㅠㅠㅠ쥬ㅠㅠ
답글삭제울면서 고백하는거나 특히 마지막 장면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거부권이 없다고 말하는 휘쇼 존나 멋있네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어딘가 텅빈 것 같은 다니엘도 존좋..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답글삭제와 존조휴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이건 문학이야!! 진짜 와 심금을 울린다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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