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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선생님.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환자들의 표정들이 사실 거기서 거기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지친 표정으로 제게 말을 건네는 다니엘을 보며 벤은 차트에 볼펜으로 뭔가를 끼적거렸다. 불면증세. 다니엘을 마지막으로 회진을 끝내면 퇴근이었다. 벤은 옆에 있던 간호사를 눈짓으로 보낸 뒤 의자를 끌어와 다니엘의 침대 옆에 앉았다.
얼마나 심하시죠?
삼일쯤...
왜 진작 말씀 안하셨어요.
그냥 기분탓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벤은 핏발 서린 다니엘의 눈을 관찰했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푸른 눈이 그의 시선을 맞받아왔다. 서서히 시야를 확장시켜 벤은 다니엘의 얼굴 전체를 눈에 담았다. 부스스한 금발과 정돈되지 않은 수염의 중년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정제를 넣어드릴게요.
...이번주까지만 넘어가 주세요.
하지만.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벤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다니엘은 생각할만 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이번주까지라는 유예의 이유로 삼았다는 점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며칠 전 벤이 다니엘에게 전했던 말과 연관이 있음에 당연했다. '가족분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어요. 이번 주까지 최대한 닿을 수 있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평범한 가장이었다. 부인과 자식이 있었고,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단란한 가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의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걸어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들려오지 않았었다.
알겠습니다. 심해지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해요.
네. 항상 고마워요, 선생님.
지친 얼굴로 웃는 다니엘의 손을 꼭 한 번 쥐어보고 벤은 일어섰다. 차트에 뭔가를 다시 끄적여 넣었다. 좀 더 강도를 높일 것. 다니엘은 아직 멀쩡했다. 그리고 벤에게는 시간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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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은 환자가 의사를 어떻게 의지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면회가 없는 환자의 경우는 특히 더 쉬웠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는 완전히 벤의 손아귀에 있다 해도 무방했다. 다니엘이 가진 힘은, 그나마도 벤이 그에게 주입시켰던 인간애에 대한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이제 그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박살내면, 다니엘은 한동안 현실을 믿지 않다가 그 다음에는 매우 상심하고 원망할 것이며, 그 후에는 의욕을 잃은 채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었다. 벤은 차근차근 꾸려나가는 일련의 과정 모두를 확신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니엘 씨. 오늘은 어떠세요? 잠은 좀 주무셨나요?
퀭한 눈 밑을 보면서도 벤은 밝은 표정과 낭랑한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벤의 얼굴을 마주쳤다. 예쁘장한 의사의 얼굴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힘을 내라고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며 다니엘은 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선생님. 잠은 오지 않아요. 그리고 깨어있을수록 자꾸.. 가족 생각이 나서 괴로워져요. 제 가족과는 연락이 되었나요?
간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다니엘에게 벤은 가만히 인상을 찌푸려보였다. 매우 상심한 얼굴을 지어보이고, 잠깐 다니엘의 눈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낮췄다. 벤은 차마 알려주기 싫은 정보를 억지로 전한다는 듯이 다니엘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직전까지의 밝은 얼굴은 대조의 정도를 한층 더 깊게 각인시켰다. 그 일련의 준비동작만으로도 다니엘의 표정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는 가족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고,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벤은 고개를 푹 숙인 다니엘의 머리를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주무르며 이야기했다.
사실 병원에서는 연락이 되지 않는 환자의 보호자를 굳이 찾지 않아요. 하지만 다니엘 씨가 저에게 말씀해주신 이야기들이 있었죠.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는 몇 주 째 행방불명인 다니엘 씨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안해요, 다니엘 씨. 알려주신 가족 분들은 런던에 없었어요. 말씀하신 주소에는 다른 가족이 살고 있었구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으며, 벤은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듯 다니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다니엘은 넋을 놓은 표정으로 벤의 목소리를 들었다. 벤이 말한 내용 중 자신이 바라던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기대했던 만큼 큰 상심에 다니엘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받으려 눈 주위를 떠나지 못했고, 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니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니엘은 벤의 손을 잡은 채로 울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하얀 가운의 의사는 환자를 안아 그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이 잦아졌을 때 속삭였다. 제가 대신 더 신경 써 드릴게요, 다니엘 씨.
잠시 후 벤은 다니엘의 동의하에 안정제를 투여했다. 근 일주일 만에 잠에 빠지는 다니엘을 내려다보며, 벤은 그가 하고 있을 생각을 추측했다. 다니엘은 자신이 말한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어서 퇴원해 그 자신이 직접 가족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벤은 다니엘을 퇴원시킬 마음이 없었다. 다니엘은 건강해지겠다는 스스로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점점 쇠약해지며, 온갖 기계와 차단되고 병원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무감해질 터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다니엘이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벤 하나뿐이었다. 벤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보살펴 드릴게요.. 다니엘 씨.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점점 잠에 취해 감겨들었다. 낮게 속삭이는 벤의 목소리에 다니엘은 한 번 더 눈물을 흘려냈다. 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괜찮다는 듯 그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다니엘은 제 손을 꼭 쥔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벤에게 고마워하며 잠이 들었다.
3
벤의 표정은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얌전히 잘 웃는 상이긴 했지만, 누구도 벤이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 더 살갑게 굴었고, 좀 더 열심히 일했으며 병원을 자신의 집으로 삼은 듯 하루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살았다. 누구나 벤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동안 다니엘은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니엘은 하루라도 빨리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벤이 조사했다는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벤은 믿었으나 그의 정보는 믿을 수 없었다. 믿기 싫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은 벤이 잘못 안 것이라고. 가족들은 집에서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따지면, 어디에서도 다니엘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다니엘은 불길한 생각은 떨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노력하는 자신만큼 몸이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몸이 철저하게 배신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부터의 일이었다. 다니엘은 또다시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다니엘 씨, 오늘은 어떠세요?
벤의 회진의 마지막 순서는 언제나 다니엘이었다. 의사의 일은 잘 모르지만, 다니엘은 벤이 자신에게 남들보다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벤은 회진시간에도 다른 환자보다 오래 다니엘과 시간을 보냈고, 쉬는 시간에도 종종 찾아왔으며 가끔은 수면도 반납하고 그와 함께 밤도 지새어 주었으므로. 그의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벤은 당연한 듯 대꾸했다. 제가 다니엘 씨의 가족이 할 일을 대신하려구요. 다니엘은 그 순간 벤의 상냥함과 벤의 말 속에 들어있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마주했다. 울컥했고, 설움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는 용케 그 순간을 버텨냈었다.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벤 선생님.
심각한 정도인가요?
...네.
벤은 침대 위에 달린 다니엘의 링거액을 점검하며 다니엘의 얼굴을 살폈다. 칙칙한 얼굴색과 퀭한 눈빛이 다니엘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벤은 차트에 ‘불면:즉각적임’을 끼적인 뒤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벤은 서늘하고 야윈 다니엘의 손을 잡고 지압을 하듯 손바닥을 꾹꾹 눌러주었다.
다른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그게, 식사를 하면 자주 구토를 해요.
일찍 나으려고 무리해서 그러는지도 몰라요. 천천히 적당량을 드시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몸이 회복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퇴원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몸이 더 상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몸 관리는커녕 식사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벤은 다시 차트에 ‘소화 불량’을 끼적이고, 작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웅크린 다니엘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다니엘 씨는 제가 보살펴드리고 있으니까. 다니엘은 젖은 눈으로 벤을 바라보았다. 능력 있고 젊고 착한 의사. 그는 ‘그래도 벤이 있어서’ 이만큼인 거라고 생각했다. 잠긴 목소리가 기어이 벤에게 떨어졌다.
벤 선생님이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벤은 웃었다. 다니엘이 착실하게 자신의 일정을 따라와 주고 있었기 때문에.
4
날이 갈수록 벤은 여유로워졌다. 반해, 다니엘은 점점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고 극도로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말을 하는 순간은 벤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는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는 자신의 몸을 진심으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에 잠들지 못하고,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이제는 걷는 것도 조금씩 힘에 겨워지는 몸은 안 그래도 온전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끝없이 위로했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자신도 노력하고 있다고. 다니엘은 괜찮아질 것이라는 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벤의 마음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기댈 곳마저 제 손으로 내칠 만큼 다니엘은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이제 많이 야위었다.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은 더 이상 벤이 약을 따로 넣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거부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불면증에 시달렸고, 잠을 자더라도 깊게 자지 못했다. 걸음을 걸을 때는 누군가의 부축이 절실해졌다. 다니엘은 벤의 어깨에 팔을 올려 부축을 받으며 담요를 두르고 병원의 공터를 산책했다. 간신히 잔디밭을 질러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다니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포기해야 하나 봐요, 선생님. 벤은 다니엘의 차가운 손을 맞잡으며 그런 말은 이르다고 타일렀지만,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다니엘은 꺾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 다음 날 벤은 다니엘의 링거에 약간의 흥분제를 투여했다. 그리고 일부러 아침 회진 때 다니엘을 홀대했고, 저녁이 될 때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다니엘은 약해진 와중에도 제 성욕은 살아있었다며 하루 종일 자조했다. 누구에게도 제 상태에 대해 말하지 못했으며, 사실 벤이 아니고서는 딱히 그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시트 밑으로 손을 넣어 혼자 해결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만뒀다. 4인 병동의 나머지 세 사람은 하나같이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살아있었다. 다니엘은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의식이 살아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세 사람을 앞에 두고 가장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익숙하게 제 정신을 학대했다. 다니엘의 마음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너덜너덜하게 밟혀있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벤이라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 채로.
당직을 자처하고 남은 벤은 밤이 깊었을 때 다니엘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니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벤을 보자마자 원망스러운 눈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벤은 그것이 그가 제 행적을 눈치 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 동안 그에게 소홀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일 것이라 짐작했다. 다니엘은 벤이 침대 간이의자에 앉았을 때 본격적으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면역력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벤은 미미한 소량만을 투여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하루 종일 쌓이고 쌓인 위에, 자신에 대한 경멸과 벤에 대한 원망이 겹쳐져 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벤은 느긋하게 다니엘을 감상했다.
선생님, 벤... 선생님.
네, 다니엘 씨.
도와..주세요.
어떻게요?
다니엘은 다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벤을 쳐다보았다.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손이 벤의 손을 끌어와 그의 물건을 쥐게 했다. 벤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고, 다니엘은 나직이 신음을 터뜨렸다. 벤은 오랜 기다림이 충족되는 느낌을 아주 잠시 만끽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것 위에서 미미하게 손을 놀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제가 다니엘 씨를 어떻게 도와드리죠?
날, 나를 안아줘요. 선생님, 제발..
턱턱 막히는 숨을 쉬며 다니엘은 벤의 팔을 잡아당겼다. 벤은 그래서 좁은 침대, 다니엘의 위로 올라타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힘들었나보네요, 다니엘 씨. 다니엘은 대답 대신 벤의 목을 끌어안았고 벤은 그 때부터 거칠게 다니엘을 안았다. 마른 다니엘의 가슴을 내리누르고, 아프게 꼬집고,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삽입했다. 다니엘은 평소에 자신이 봐 왔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벤을 받아들이며 내내 울었다. 생리적인 아픔과, 제 부탁 때문에 자신을 억지로 안고 있는 벤에 대한 미안함과, 그 와중에도 흥분하는 자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벤은 다니엘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쉬, 소리는 낮춰요, 다니엘 씨. 다른 환자들이 듣잖아. 다니엘은 곧 넘어갈 듯 숨을 쉬어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 밤의 행위는 다니엘이 몇 번이나 사정하고, 몇 번이나 벤을 받아내고 난 다음에야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다니엘은 벤이 없을 때 눈에 띄게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벤이 없는 상황을 견뎌내질 못했다. 여태까지의 생활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것조차 이상하게 힘이 든다고, 다니엘은 결국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벤은 여느 때처럼 다니엘의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은 제 말에 그가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벤은, 기다려왔던 것을 손에 넣은 기분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5
벤은 죽어가고, 동시에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한 다니엘을 사랑했다. 다니엘은 이제 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니엘을 담당한 간병인들은 하나같이 며칠을 넘기지 못했고, 유일하게 다니엘을 상대할 수 있는 벤이 그를 맡아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게 되었다. 다니엘은 벤이 떠주는 밥을 먹고, 벤의 손으로 목욕했고, 벤의 손을 거쳐 용변을 보고, 벤에게 매달려 생활했다. 누구나 벤을 독점하려는 다니엘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벤 스스로가 거리낌 없이 다니엘을 아끼고 사랑하며 간병했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누군가 다니엘을 욕하면, 벤은 불같이 화를 냈다. 평소의 모습과 무서울 만큼 달라지는 그 표정과 언성은 금세 소문이 퍼져서, 아무도 벤의 앞에서 다니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속으로만 가족도, 무엇도 없는 다니엘이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고, 비로소 그 때에서야 벤이 다니엘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된 가정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벤은 물론 정정해주지 않았다.
저 때문에 다른 일은 못 하시는 거죠.
신경 쓰지 마세요. 해야 하는 일은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까.
미안합니다.
뭐가요?
...벤 선생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제가요. 선생님도 싫으시죠.
제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다니엘의 시선을 차마 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벤은 혀를 씹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냈다. 싫다니. 다니엘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벤이 갈망하던 문장과 단어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하나같이 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말이었다. 다니엘의 행동도 달라졌다. 비쩍 마른 몸을 목욕시키는 것도, 누군가에게 용변의 뒤처리를 맡기는 것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벤이라도, 혹은 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다니엘은 그런 것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 바람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은 아주 기쁘게 다니엘을 수발했고, 다니엘의 정신은 점점 더 벤을 중심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온전히 벤의 것이었다. 벤은 삶에 가장 기쁜 순간들이 지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첫 섹스 이후로도 그들은 간간이 다니엘의 침대 위에서 몸을 섞었다. 다니엘이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온전히 벤의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오히려 그것을 고마워했다.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은 다니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으므로. 캄캄한 밤 불 꺼진 병실 속의 듣지 못하는 환자들 가운데에서, 벤은 다니엘을 안았고 차마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털어냈다. 살과 근육이 몽땅 빠져 뼈만 남은 듯한 다니엘의 다리는 허공에서 흔들리고, 여전히 거칠게 움직이는 벤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다니엘은 울면서 신음했다. 그럴 때마다, 몸을 가를 듯 거칠게 자신을 다루는 벤에게 다니엘이 하는 말이 있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버리지 마세요’ ‘더 해줘요’ 벤은 신음 속에 섞여 나오는 단어를 인식할 때마다 정말로 다니엘을 으스러뜨릴 듯 몸을 놀렸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 듯이 그의 앞에서 웃고 싶었다. 제 마음을 그대로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제 벤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유지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사라진 건 일주일 후의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마지막 회진으로 다니엘을 찾아온 벤은 그의 침대가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링거액은 주인 없이 주삿바늘에서 액을 떨어뜨리고, 시트는 구겨진 채, 신발도 가지런히 놓여있던 채였다. 벤은 즉시 이성을 잃었고 미친 듯이 다니엘을 찾기 시작했다.
다니엘 씨, 다니엘 크레이그 환자 어디 있어요?
...네? 환자가 없어졌나요?
있어야 할 사람이 없잖아요.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왜 없어져!!!
선, 선생님?
본 사람 없어요? 다니엘 크레이그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없어요? 없어?
진정하시고...
어떻게 그 사람이 움직이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냐고!!!!!
벤은 비정상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다니엘이 사라진 것의 책임이 병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처럼. 벤의 갑작스럽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변화에 모두가 아연해하며 다니엘을 찾기 시작했다. 벤은 중환자실을, 1인실을, 하다못해 여자 화장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뒤지다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니엘에게 이동의 수단이 있다면 엘리베이터 뿐이었다. 벤은 다니엘이 1층으로 내려가 병원 밖으로 나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옥상으로 뛰어올라갔고, 그곳에서 멍하니 서있는 다니엘을 발견했다. 얇은 병원복 차림으로 맨발로 선 다니엘은 멍하니 옥상에서 런던의 풍경을 내려보고 있었다. 벤은 세차게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다니엘 씨, 여기 계셨어요?
...벤 선생님.
바람이 차요. 신발도 안 신고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저한테 말을 하시지.
그냥.. 혼자 뭔가를 해본 적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미안해요.
...걱정했어요. 이제 내려가요. 감기 걸리잖아요. 나중에 산책을 갈까요?
네...
소동은 다니엘이 병실에 돌아오는 것으로 종료됐다. 벤은 다니엘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었다. 그리고 새로 간 이불을 덮어주고,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다니엘 씨를 보살펴드린다고 했으니까.
다니엘은 그날 이후로 병실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침대 옆에는 휠체어가 구비되었다. 병원 사람들은 벤의 행동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여전히 온전히 벤만을 의지한 채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몸을 원망하고 있었다.
6
벤 휘쇼의 하루는 매우 틀에 박혀 있었다. 그는 오늘내일을 다투는 환자들 사이를 누비고, 스스로조차 그다지 희망적인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에게 좋아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해대며, 판에 박힌 약물을 주사했고, 마음 없이 환자를 시술했다. 언제나 그와 환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었다. 벤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홀로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그것은 비단 환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벤에게는 깊은 인간관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제 머릿속에 입력되어있는 정보만을 활용하며 살고 있었다. 사실 그 정보도 원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조차도 벤은 아무 생각 없이 주입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다니엘이 나타났다. 원인 모를 쇼크로 병원에 실려 온 다니엘은 몇 달 동안이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다니엘의 가족은 병원을 떠나지 않으며 그의 곁을 지켰고, 매일같이 벤에게 다니엘의 상태를 물었다. 벤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다른 대답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부정적이고, 언제 깨어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가족은 수십 번씩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듣기 위해 매일같이 다니엘을 찾아왔다. 벤은 그들을, 특히 다니엘의 부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지쳐갔고,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의 주기도 짧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묻는 질문은 어느 순간부터 의식 불명의 다니엘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어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다니엘은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누구도 다시는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의 가족이 자신을 버린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벤을 만났다.
이후 벤이 다니엘을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에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벤이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한 일이었다. 그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미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다니엘이 그의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벤은 구태여 다니엘에게 그의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가족에게도 다니엘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병원의 직원들, 몇몇 환자는 벤이 달라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비웠던 다니엘의 소동 이후로 그들은 다니엘을 대하는 벤의 태도에 좀 더 신중히 시선을 기울였다. 그러나 벤은 치밀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벤의 설명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도리어 다니엘을 대하는 벤의 극진한 정성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 마르고 생기 없는 중년 남성은 벤과 함께일 때 그나마 살아있는 듯 보였다. 물증이 없는 심증은 쉽게 폐기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확실치 않은 의심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벤을 호스피스의 일까지 스스로 떠맡은 존경스러운 의사로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신경 쓸 일이 그것 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럼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누구도, 벤과 다니엘의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다니엘의 생각을 알 수 없었고, 그의 계획을 알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니엘이 병원에 들어온 지 10개월이 조금 넘은 겨울에 일어났다. 다니엘은 여전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아침, 벤이 회진을 돌기 시작한 시간에 맞춰 제 팔에 꽂힌 커다란 주사바늘을 빼내어 최대한 깊숙이 손목을 그었다. 겨울답게 차가운 공기가 떠돌았지만 햇살만큼은 따뜻한 아침이었다. 다니엘은 흉하게 말라 살가죽만 남은 팔목을 무릎 위에 대고, 이를 꽉 깨문 채로 혈관이 두드러진 자리를 공들여 난도질했다. 고통은 즉각적으로 끝나지 않았고 꽤 커다란 신음이 병실을 채웠지만, 병실 안의 누구도 들을 수 없었고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다니엘은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팔목을 시트 밑으로 숨기고, 피에 젖지 않은 새 이불을 꺼내 몸 위로 둘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벤이 고마웠다. 그는 낯선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벤에 의해 살아왔다고 해도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지쳐있었다. 다니엘은 스스로에게 지쳤고, 가망 없는 현실에 지쳤고, 대가 없이 베푸는 벤의 선행에 지쳤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지쳐버렸다. 나아질 것 없는 상황 속에서 이어지는 벤의 친절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니엘은 자신 때문에 벤이 망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극도의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사람이었다. 벤은 바로 그것을 원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홀대했다. 다니엘은 그 정도의 깊이에 대해서는 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벤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늦게 다니엘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웃으며 다니엘에게 다가갔고, 여느 때보다 훨씬 창백한 다니엘의 얼굴을 마주했다. 습관처럼 손을 뻗은 간이의자 밑으로는 흥건하게 고인 핏물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벤은 하얀 시트와 대비되는 강렬한 색깔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그런 벤을 향해 아주 작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냈다. 벤은 여전히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벤 선생님. 선생님은 나를 보살펴 주겠다고 하셨죠. 하지만 아니에요, 나는 그럴 만 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벤 선생님이 있어서 그래도 행복했어요.
다니엘은 아주 느린 목소리로, 그리 길지 않은 문장들을 오랫동안 발음했다. 벤은 병원 안에서, 바로 제 앞에서 죽어가는 다니엘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고개가 힘을 잃고 고꾸라졌을 때에야 벌벌 떨며 그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그는 피가 흥건한 매트리스에 주저앉아 다니엘의 몸을 제 품에 받치고, 귀에 입을 대고 쉴 새 없이 속삭였다. 다니엘은 그 품에서 더 이상 파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다니엘 씨. 정신 차리세요. 나는 아직 당신을 보내줄 수 없다고요. 이게 뭐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돌봐주겠다고 했잖아요. 사랑해요. 다니엘 씨, 제 말이 들리나요? 들려요? 안 들려? 가지 마세요. 제가 보살펴주겠다고..
벤의 속삭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아주 뒤늦게 누군가가 벤과 다니엘을 떼어놓은 후에야 벤은 다니엘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다니엘은 온전히 벤의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제 눈앞에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벤은 자신도 온전히 다니엘의 것이었음을 그 순간 깨달았다.
7
벤은 주사기에 약물을 가득 채웠다. 다니엘의 침대는 더 이상 다니엘의 침대가 아니었고, 바닥은 깨끗이 닦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벤은 침대 위로 올라가 베개에 코를 박고 누웠다. 그리고 주삿바늘을 제 팔에 찔러넣고, 약물이 온 몸에 퍼지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다니엘이 혼자 지새던 밤, 잠 못 들었던 밤을 생각하며 벤은 자신이 그 모자람을 채워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빼앗았던 그 시간을 꼬박 채우면 다시 다니엘을 만날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벤은 내일 아침에도, 모레 아침에도 자신이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이 퍽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
벤 선생님. 잠을 잘 수가 없어요.
환자들의 표정들이 사실 거기서 거기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지친 표정으로 제게 말을 건네는 다니엘을 보며 벤은 차트에 볼펜으로 뭔가를 끼적거렸다. 불면증세. 다니엘을 마지막으로 회진을 끝내면 퇴근이었다. 벤은 옆에 있던 간호사를 눈짓으로 보낸 뒤 의자를 끌어와 다니엘의 침대 옆에 앉았다.
얼마나 심하시죠?
삼일쯤...
왜 진작 말씀 안하셨어요.
그냥 기분탓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벤은 핏발 서린 다니엘의 눈을 관찰했다. 매우 피곤해 보이는 푸른 눈이 그의 시선을 맞받아왔다. 서서히 시야를 확장시켜 벤은 다니엘의 얼굴 전체를 눈에 담았다. 부스스한 금발과 정돈되지 않은 수염의 중년 남성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정제를 넣어드릴게요.
...이번주까지만 넘어가 주세요.
하지만.
생각할 게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르니까..
벤은 그게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다니엘은 생각할만 한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굳이 이번주까지라는 유예의 이유로 삼았다는 점이 잘못되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며칠 전 벤이 다니엘에게 전했던 말과 연관이 있음에 당연했다. '가족분들과 연락을 취하고 있어요. 이번 주까지 최대한 닿을 수 있게 노력해 보겠습니다'
다니엘은 평범한 가장이었다. 부인과 자식이 있었고, 누구나가 부러워하는 단란한 가정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병실의 침대 위에 누워 다니엘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의 휴대폰을 빌려 전화를 걸어보아도 아무런 응답이 들려오지 않았었다.
알겠습니다. 심해지면 바로 말씀해 주셔야 해요.
네. 항상 고마워요, 선생님.
지친 얼굴로 웃는 다니엘의 손을 꼭 한 번 쥐어보고 벤은 일어섰다. 차트에 뭔가를 다시 끄적여 넣었다. 좀 더 강도를 높일 것. 다니엘은 아직 멀쩡했다. 그리고 벤에게는 시간이 충분했다.
2
벤은 환자가 의사를 어떻게 의지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다. 면회가 없는 환자의 경우는 특히 더 쉬웠다. 그런 점에서 다니엘 크레이그는 완전히 벤의 손아귀에 있다 해도 무방했다. 다니엘이 가진 힘은, 그나마도 벤이 그에게 주입시켰던 인간애에 대한 믿음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으므로. 이제 그 우스꽝스러운 믿음을 박살내면, 다니엘은 한동안 현실을 믿지 않다가 그 다음에는 매우 상심하고 원망할 것이며, 그 후에는 의욕을 잃은 채 유일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에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될 것이었다. 벤은 차근차근 꾸려나가는 일련의 과정 모두를 확신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니엘 씨. 오늘은 어떠세요? 잠은 좀 주무셨나요?
퀭한 눈 밑을 보면서도 벤은 밝은 표정과 낭랑한 목소리로 다니엘에게 물었다. 다니엘은 힘없이 고개를 저으며 벤의 얼굴을 마주쳤다. 예쁘장한 의사의 얼굴이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힘을 내라고 그러는 것이라 생각하며 다니엘은 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니요, 선생님. 잠은 오지 않아요. 그리고 깨어있을수록 자꾸.. 가족 생각이 나서 괴로워져요. 제 가족과는 연락이 되었나요?
간절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다니엘에게 벤은 가만히 인상을 찌푸려보였다. 매우 상심한 얼굴을 지어보이고, 잠깐 다니엘의 눈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낮췄다. 벤은 차마 알려주기 싫은 정보를 억지로 전한다는 듯이 다니엘의 손을 한 번 꽉 잡았다. 직전까지의 밝은 얼굴은 대조의 정도를 한층 더 깊게 각인시켰다. 그 일련의 준비동작만으로도 다니엘의 표정은 거의 무너져 내렸다. 굳이 듣지 않아도 그는 가족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고, 어떤 정보도 알아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벤은 고개를 푹 숙인 다니엘의 머리를 바라보며 그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주무르며 이야기했다.
사실 병원에서는 연락이 되지 않는 환자의 보호자를 굳이 찾지 않아요. 하지만 다니엘 씨가 저에게 말씀해주신 이야기들이 있었죠. 그런 가정 분위기에서는 몇 주 째 행방불명인 다니엘 씨를 찾지 않는다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거라고요. 그래서 제가 개인적으로 찾아봤지만... 아무것도 없었어요. 미안해요, 다니엘 씨. 알려주신 가족 분들은 런던에 없었어요. 말씀하신 주소에는 다른 가족이 살고 있었구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으며, 벤은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듯 다니엘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다니엘은 넋을 놓은 표정으로 벤의 목소리를 들었다. 벤이 말한 내용 중 자신이 바라던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기대했던 만큼 큰 상심에 다니엘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이 자꾸만 흐르는 눈물을 받으려 눈 주위를 떠나지 못했고, 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다니엘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다니엘은 벤의 손을 잡은 채로 울다가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하얀 가운의 의사는 환자를 안아 그가 마음껏 울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리고 그의 눈물이 잦아졌을 때 속삭였다. 제가 대신 더 신경 써 드릴게요, 다니엘 씨.
잠시 후 벤은 다니엘의 동의하에 안정제를 투여했다. 근 일주일 만에 잠에 빠지는 다니엘을 내려다보며, 벤은 그가 하고 있을 생각을 추측했다. 다니엘은 자신이 말한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된 이상 어서 퇴원해 그 자신이 직접 가족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러나 벤은 다니엘을 퇴원시킬 마음이 없었다. 다니엘은 건강해지겠다는 스스로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점점 쇠약해지며, 온갖 기계와 차단되고 병원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무감해질 터였다. 바로 그 지점에서 다니엘이 온전히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벤 하나뿐이었다. 벤은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가 보살펴 드릴게요.. 다니엘 씨.
눈물에 젖은 속눈썹이 점점 잠에 취해 감겨들었다. 낮게 속삭이는 벤의 목소리에 다니엘은 한 번 더 눈물을 흘려냈다. 벤은 다 알고 있다는 듯, 괜찮다는 듯 그의 눈물을 훔쳐 주었다. 다니엘은 제 손을 꼭 쥔 채로 저를 내려다보는 벤에게 고마워하며 잠이 들었다.
3
벤의 표정은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고 있었다. 평소에도 얌전히 잘 웃는 상이긴 했지만, 누구도 벤이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다른 환자들에게 더 살갑게 굴었고, 좀 더 열심히 일했으며 병원을 자신의 집으로 삼은 듯 하루의 대부분을 병원에서 살았다. 누구나 벤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동안 다니엘은 의욕을 잃어가고 있었다.
다니엘은 하루라도 빨리 병원을 나가고 싶었다. 벤이 조사했다는 정보의 신빙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벤은 믿었으나 그의 정보는 믿을 수 없었다. 믿기 싫었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가,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사실은 벤이 잘못 안 것이라고. 가족들은 집에서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따지면, 어디에서도 다니엘을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다니엘은 불길한 생각은 떨치고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노력하는 자신만큼 몸이 말을 제대로 들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의 몸이 철저하게 배신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 전부터의 일이었다. 다니엘은 또다시 불면증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다니엘 씨, 오늘은 어떠세요?
벤의 회진의 마지막 순서는 언제나 다니엘이었다. 의사의 일은 잘 모르지만, 다니엘은 벤이 자신에게 남들보다 더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벤은 회진시간에도 다른 환자보다 오래 다니엘과 시간을 보냈고, 쉬는 시간에도 종종 찾아왔으며 가끔은 수면도 반납하고 그와 함께 밤도 지새어 주었으므로. 그의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자 벤은 당연한 듯 대꾸했다. 제가 다니엘 씨의 가족이 할 일을 대신하려구요. 다니엘은 그 순간 벤의 상냥함과 벤의 말 속에 들어있는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마주했다. 울컥했고, 설움이 목까지 차올랐으나 그는 용케 그 순간을 버텨냈었다.
다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벤 선생님.
심각한 정도인가요?
...네.
벤은 침대 위에 달린 다니엘의 링거액을 점검하며 다니엘의 얼굴을 살폈다. 칙칙한 얼굴색과 퀭한 눈빛이 다니엘의 상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벤은 차트에 ‘불면:즉각적임’을 끼적인 뒤 다니엘의 손을 잡았다. 벤은 서늘하고 야윈 다니엘의 손을 잡고 지압을 하듯 손바닥을 꾹꾹 눌러주었다.
다른 불편한 점은 없으세요?
..그게, 식사를 하면 자주 구토를 해요.
일찍 나으려고 무리해서 그러는지도 몰라요. 천천히 적당량을 드시고 마음을 편하게 가지세요. 몸이 회복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퇴원이 조금 늦어지더라도 몸이 더 상하는 것보다는 낫잖아요?
다니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몸 관리는커녕 식사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벤은 다시 차트에 ‘소화 불량’을 끼적이고, 작게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리고 웅크린 다니엘의 등을 쓸어주며 말했다. 괜찮아질 거예요. 다니엘 씨는 제가 보살펴드리고 있으니까. 다니엘은 젖은 눈으로 벤을 바라보았다. 능력 있고 젊고 착한 의사. 그는 ‘그래도 벤이 있어서’ 이만큼인 거라고 생각했다. 잠긴 목소리가 기어이 벤에게 떨어졌다.
벤 선생님이 있어서 그래도 다행이에요.
벤은 웃었다. 다니엘이 착실하게 자신의 일정을 따라와 주고 있었기 때문에.
4
날이 갈수록 벤은 여유로워졌다. 반해, 다니엘은 점점 사소한 일에도 예민해졌고 극도로 말수가 줄어들었다. 그가 유일하게 감정을 드러내고 말을 하는 순간은 벤과 함께 있을 때뿐이었다. 그는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는 자신의 몸을 진심으로 미워하기 시작했다. 캄캄한 밤에 잠들지 못하고, 음식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이제는 걷는 것도 조금씩 힘에 겨워지는 몸은 안 그래도 온전하지 않았던 다니엘의 정신을 좀먹기 시작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끝없이 위로했다. 괜찮아질 것이라고. 자신도 노력하고 있다고. 다니엘은 괜찮아질 것이라는 벤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벤의 마음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기댈 곳마저 제 손으로 내칠 만큼 다니엘은 여유로운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니엘은 이제 많이 야위었다. 음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몸은 더 이상 벤이 약을 따로 넣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거부했다. 일주일에 사나흘은 불면증에 시달렸고, 잠을 자더라도 깊게 자지 못했다. 걸음을 걸을 때는 누군가의 부축이 절실해졌다. 다니엘은 벤의 어깨에 팔을 올려 부축을 받으며 담요를 두르고 병원의 공터를 산책했다. 간신히 잔디밭을 질러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며 다니엘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포기해야 하나 봐요, 선생님. 벤은 다니엘의 차가운 손을 맞잡으며 그런 말은 이르다고 타일렀지만, 가득 차오르는 기쁨을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써야 했다. 다니엘은 꺾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그 다음 날 벤은 다니엘의 링거에 약간의 흥분제를 투여했다. 그리고 일부러 아침 회진 때 다니엘을 홀대했고, 저녁이 될 때까지 그를 찾지 않았다. 다니엘은 약해진 와중에도 제 성욕은 살아있었다며 하루 종일 자조했다. 누구에게도 제 상태에 대해 말하지 못했으며, 사실 벤이 아니고서는 딱히 그를 찾는 사람도 없었다. 시트 밑으로 손을 넣어 혼자 해결해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만뒀다. 4인 병동의 나머지 세 사람은 하나같이 말할 수도, 움직일 수도 없는 상태였지만 살아있었다. 다니엘은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의식이 살아있는지조차 불분명한 세 사람을 앞에 두고 가장 원초적인 쾌락을 추구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대신 익숙하게 제 정신을 학대했다. 다니엘의 마음은 바로 그 자신에 의해 너덜너덜하게 밟혀있었다. 그 모든 것의 원인이 벤이라는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 채로.
당직을 자처하고 남은 벤은 밤이 깊었을 때 다니엘의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니엘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벤을 보자마자 원망스러운 눈으로 눈물을 쏟아냈다. 벤은 그것이 그가 제 행적을 눈치 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루 동안 그에게 소홀했던 자신에 대한 원망일 것이라 짐작했다. 다니엘은 벤이 침대 간이의자에 앉았을 때 본격적으로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다니엘의 면역력이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벤은 미미한 소량만을 투여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하루 종일 쌓이고 쌓인 위에, 자신에 대한 경멸과 벤에 대한 원망이 겹쳐져 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벤은 느긋하게 다니엘을 감상했다.
선생님, 벤... 선생님.
네, 다니엘 씨.
도와..주세요.
어떻게요?
다니엘은 다시 원망스러운 눈으로 벤을 쳐다보았다. 힘이 없어 덜덜 떨리는 손이 벤의 손을 끌어와 그의 물건을 쥐게 했다. 벤은 순간 눈을 질끈 감았고, 다니엘은 나직이 신음을 터뜨렸다. 벤은 오랜 기다림이 충족되는 느낌을 아주 잠시 만끽했다. 그리고 다니엘의 것 위에서 미미하게 손을 놀리며 그에게 이야기했다.
제가 다니엘 씨를 어떻게 도와드리죠?
날, 나를 안아줘요. 선생님, 제발..
턱턱 막히는 숨을 쉬며 다니엘은 벤의 팔을 잡아당겼다. 벤은 그래서 좁은 침대, 다니엘의 위로 올라타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힘들었나보네요, 다니엘 씨. 다니엘은 대답 대신 벤의 목을 끌어안았고 벤은 그 때부터 거칠게 다니엘을 안았다. 마른 다니엘의 가슴을 내리누르고, 아프게 꼬집고, 제대로 풀어주지도 않은 채 그대로 삽입했다. 다니엘은 평소에 자신이 봐 왔던 모습과는 전혀 딴판인 벤을 받아들이며 내내 울었다. 생리적인 아픔과, 제 부탁 때문에 자신을 억지로 안고 있는 벤에 대한 미안함과, 그 와중에도 흥분하는 자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벤은 다니엘의 입을 손으로 막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쉬, 소리는 낮춰요, 다니엘 씨. 다른 환자들이 듣잖아. 다니엘은 곧 넘어갈 듯 숨을 쉬어대며 허리를 비틀었다. 그 밤의 행위는 다니엘이 몇 번이나 사정하고, 몇 번이나 벤을 받아내고 난 다음에야 끝이 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다니엘은 벤이 없을 때 눈에 띄게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벤이 없는 상황을 견뎌내질 못했다. 여태까지의 생활을 그대로 이어나가는 것조차 이상하게 힘이 든다고, 다니엘은 결국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벤은 여느 때처럼 다니엘의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 다니엘은 제 말에 그가 고민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벤은, 기다려왔던 것을 손에 넣은 기분을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5
벤은 죽어가고, 동시에 자신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한 다니엘을 사랑했다. 다니엘은 이제 벤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니엘을 담당한 간병인들은 하나같이 며칠을 넘기지 못했고, 유일하게 다니엘을 상대할 수 있는 벤이 그를 맡아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게 되었다. 다니엘은 벤이 떠주는 밥을 먹고, 벤의 손으로 목욕했고, 벤의 손을 거쳐 용변을 보고, 벤에게 매달려 생활했다. 누구나 벤을 독점하려는 다니엘을 곱게 보지 않았다. 그러나 벤 스스로가 거리낌 없이 다니엘을 아끼고 사랑하며 간병했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쉽사리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누군가 다니엘을 욕하면, 벤은 불같이 화를 냈다. 평소의 모습과 무서울 만큼 달라지는 그 표정과 언성은 금세 소문이 퍼져서, 아무도 벤의 앞에서 다니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들은 속으로만 가족도, 무엇도 없는 다니엘이 곧 죽을 것이라 생각했고, 비로소 그 때에서야 벤이 다니엘의 속박으로부터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것이 잘못된 가정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벤은 물론 정정해주지 않았다.
저 때문에 다른 일은 못 하시는 거죠.
신경 쓰지 마세요. 해야 하는 일은 나름대로 하고 있으니까.
미안합니다.
뭐가요?
...벤 선생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제가요. 선생님도 싫으시죠.
제 눈을 바라보며 말하는 다니엘의 시선을 차마 피하지 못했기 때문에, 벤은 혀를 씹으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냈다. 싫다니. 다니엘은 이제 하루에도 몇 번씩 벤이 갈망하던 문장과 단어들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하나같이 벤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말이었다. 다니엘의 행동도 달라졌다. 비쩍 마른 몸을 목욕시키는 것도, 누군가에게 용변의 뒤처리를 맡기는 것도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벤이라도, 혹은 벤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다니엘은 그런 것을 맡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제 바람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벤은 아주 기쁘게 다니엘을 수발했고, 다니엘의 정신은 점점 더 벤을 중심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온전히 벤의 것이었다. 벤은 삶에 가장 기쁜 순간들이 지금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첫 섹스 이후로도 그들은 간간이 다니엘의 침대 위에서 몸을 섞었다. 다니엘이 원해서 한 것은 아니었다. 그 행위는 온전히 벤의 욕망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니엘에게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니엘은 오히려 그것을 고마워했다. 누군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은 다니엘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으므로. 캄캄한 밤 불 꺼진 병실 속의 듣지 못하는 환자들 가운데에서, 벤은 다니엘을 안았고 차마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을 털어냈다. 살과 근육이 몽땅 빠져 뼈만 남은 듯한 다니엘의 다리는 허공에서 흔들리고, 여전히 거칠게 움직이는 벤의 어깨를 부여잡은 채 다니엘은 울면서 신음했다. 그럴 때마다, 몸을 가를 듯 거칠게 자신을 다루는 벤에게 다니엘이 하는 말이 있었다. ‘고마워요’ ‘미안해요’ ‘버리지 마세요’ ‘더 해줘요’ 벤은 신음 속에 섞여 나오는 단어를 인식할 때마다 정말로 다니엘을 으스러뜨릴 듯 몸을 놀렸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 듯이 그의 앞에서 웃고 싶었다. 제 마음을 그대로 토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참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제 벤에게 필요한 것은 현상유지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사라진 건 일주일 후의 아침이었다. 여느 때처럼 마지막 회진으로 다니엘을 찾아온 벤은 그의 침대가 텅 비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링거액은 주인 없이 주삿바늘에서 액을 떨어뜨리고, 시트는 구겨진 채, 신발도 가지런히 놓여있던 채였다. 벤은 즉시 이성을 잃었고 미친 듯이 다니엘을 찾기 시작했다.
다니엘 씨, 다니엘 크레이그 환자 어디 있어요?
...네? 환자가 없어졌나요?
있어야 할 사람이 없잖아요.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왜 없어져!!!
선, 선생님?
본 사람 없어요? 다니엘 크레이그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 없어요? 없어?
진정하시고...
어떻게 그 사람이 움직이는 걸 본 사람이 아무도 없냐고!!!!!
벤은 비정상적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다니엘이 사라진 것의 책임이 병원의 모든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처럼. 벤의 갑작스럽고, 상상하지도 못했던 변화에 모두가 아연해하며 다니엘을 찾기 시작했다. 벤은 중환자실을, 1인실을, 하다못해 여자 화장실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뒤지다 계단을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다니엘에게 이동의 수단이 있다면 엘리베이터 뿐이었다. 벤은 다니엘이 1층으로 내려가 병원 밖으로 나갔다고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옥상으로 뛰어올라갔고, 그곳에서 멍하니 서있는 다니엘을 발견했다. 얇은 병원복 차림으로 맨발로 선 다니엘은 멍하니 옥상에서 런던의 풍경을 내려보고 있었다. 벤은 세차게 요동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다니엘 씨, 여기 계셨어요?
...벤 선생님.
바람이 차요. 신발도 안 신고 왜 여기까지 오셨어요. 저한테 말을 하시지.
그냥.. 혼자 뭔가를 해본 적이 너무 오래된 것 같아서.. 미안해요.
...걱정했어요. 이제 내려가요. 감기 걸리잖아요. 나중에 산책을 갈까요?
네...
소동은 다니엘이 병실에 돌아오는 것으로 종료됐다. 벤은 다니엘의 발을 따뜻한 물로 씻어주었다. 그리고 새로 간 이불을 덮어주고, 의자에 앉아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뭐든 말씀하세요. 제가 다니엘 씨를 보살펴드린다고 했으니까.
다니엘은 그날 이후로 병실 바깥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침대 옆에는 휠체어가 구비되었다. 병원 사람들은 벤의 행동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여전히 온전히 벤만을 의지한 채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몸을 원망하고 있었다.
6
벤 휘쇼의 하루는 매우 틀에 박혀 있었다. 그는 오늘내일을 다투는 환자들 사이를 누비고, 스스로조차 그다지 희망적인 가능성이 없는 환자들에게 좋아질 것이라는 거짓말을 해대며, 판에 박힌 약물을 주사했고, 마음 없이 환자를 시술했다. 언제나 그와 환자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두꺼운 벽이 있었다. 벤에게 의지하고 싶어 하는 환자들은 하나같이 홀로 지쳐 나가떨어지기 일쑤였다. 그것은 비단 환자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벤에게는 깊은 인간관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 생각 없이, 아무 것도 원하지 않으며 제 머릿속에 입력되어있는 정보만을 활용하며 살고 있었다. 사실 그 정보도 원해서 얻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조차도 벤은 아무 생각 없이 주입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차에 다니엘이 나타났다. 원인 모를 쇼크로 병원에 실려 온 다니엘은 몇 달 동안이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다니엘의 가족은 병원을 떠나지 않으며 그의 곁을 지켰고, 매일같이 벤에게 다니엘의 상태를 물었다. 벤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다른 대답이 나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부정적이고, 언제 깨어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다니엘의 가족은 수십 번씩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듣기 위해 매일같이 다니엘을 찾아왔다. 벤은 그들을, 특히 다니엘의 부인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은 날이 갈수록 지쳐갔고,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의 주기도 짧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묻는 질문은 어느 순간부터 의식 불명의 다니엘을 포기하는 이유가 되어 있었다.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는 다니엘은 그래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누구도 다시는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다니엘은 그의 가족이 자신을 버린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의식을 회복했다. 그리고 벤을 만났다.
이후 벤이 다니엘을 소유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에 다른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벤이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던 것처럼 아무 생각 없이 결정한 일이었다. 그는 그냥 그러고 싶었다. 이미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늘어놓는 다니엘이 그의 마음에 들었을 뿐이었다. 벤은 구태여 다니엘에게 그의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물론 가족에게도 다니엘의 이야기를 전하지 않았다.
병원의 직원들, 몇몇 환자는 벤이 달라진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런 말없이 자리를 비웠던 다니엘의 소동 이후로 그들은 다니엘을 대하는 벤의 태도에 좀 더 신중히 시선을 기울였다. 그러나 벤은 치밀한 사람이었고, 그들은 벤의 설명할 수 없는 변화에 대해 아무것도 증명해내지 못했다. 도리어 다니엘을 대하는 벤의 극진한 정성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듯 마르고 생기 없는 중년 남성은 벤과 함께일 때 그나마 살아있는 듯 보였다. 물증이 없는 심증은 쉽게 폐기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곧 확실치 않은 의심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벤을 호스피스의 일까지 스스로 떠맡은 존경스러운 의사로 그 지위를 격상시켰다. 신경 쓸 일이 그것 외에도 많은 사람들은 그럼으로써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누구도, 벤과 다니엘의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누구도 다니엘의 생각을 알 수 없었고, 그의 계획을 알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
그것은 다니엘이 병원에 들어온 지 10개월이 조금 넘은 겨울에 일어났다. 다니엘은 여전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아침, 벤이 회진을 돌기 시작한 시간에 맞춰 제 팔에 꽂힌 커다란 주사바늘을 빼내어 최대한 깊숙이 손목을 그었다. 겨울답게 차가운 공기가 떠돌았지만 햇살만큼은 따뜻한 아침이었다. 다니엘은 흉하게 말라 살가죽만 남은 팔목을 무릎 위에 대고, 이를 꽉 깨문 채로 혈관이 두드러진 자리를 공들여 난도질했다. 고통은 즉각적으로 끝나지 않았고 꽤 커다란 신음이 병실을 채웠지만, 병실 안의 누구도 들을 수 없었고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다니엘은 피가 흐르기 시작하는 팔목을 시트 밑으로 숨기고, 피에 젖지 않은 새 이불을 꺼내 몸 위로 둘렀다. 그리고 그 상태로 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다니엘은 벤이 고마웠다. 그는 낯선 병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지금까지, 벤에 의해 살아왔다고 해도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매우 지쳐있었다. 다니엘은 스스로에게 지쳤고, 가망 없는 현실에 지쳤고, 대가 없이 베푸는 벤의 선행에 지쳤고,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지쳐버렸다. 나아질 것 없는 상황 속에서 이어지는 벤의 친절을 견뎌낼 자신이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니엘은 자신 때문에 벤이 망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부터 극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극도의 자기혐오에 시달려온 사람이었다. 벤은 바로 그것을 원했지만 동시에 그것을 홀대했다. 다니엘은 그 정도의 깊이에 대해서는 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벤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늦게 다니엘에게 도착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웃으며 다니엘에게 다가갔고, 여느 때보다 훨씬 창백한 다니엘의 얼굴을 마주했다. 습관처럼 손을 뻗은 간이의자 밑으로는 흥건하게 고인 핏물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벤은 하얀 시트와 대비되는 강렬한 색깔에 사로잡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다니엘은 그런 벤을 향해 아주 작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소리를 냈다. 벤은 여전히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벤 선생님. 선생님은 나를 보살펴 주겠다고 하셨죠. 하지만 아니에요, 나는 그럴 만 한 사람이 아니에요. 나는.. 벤 선생님이 있어서 그래도 행복했어요.
다니엘은 아주 느린 목소리로, 그리 길지 않은 문장들을 오랫동안 발음했다. 벤은 병원 안에서, 바로 제 앞에서 죽어가는 다니엘을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고개가 힘을 잃고 고꾸라졌을 때에야 벌벌 떨며 그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그는 피가 흥건한 매트리스에 주저앉아 다니엘의 몸을 제 품에 받치고, 귀에 입을 대고 쉴 새 없이 속삭였다. 다니엘은 그 품에서 더 이상 파란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
아니에요, 다니엘 씨. 정신 차리세요. 나는 아직 당신을 보내줄 수 없다고요. 이게 뭐야,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니에요. 나는 당신의 가족이 되고 싶었어요. 내가 돌봐주겠다고 했잖아요. 사랑해요. 다니엘 씨, 제 말이 들리나요? 들려요? 안 들려? 가지 마세요. 제가 보살펴주겠다고..
벤의 속삭임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다. 아주 뒤늦게 누군가가 벤과 다니엘을 떼어놓은 후에야 벤은 다니엘이 더 이상 살아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다니엘은 온전히 벤의 것이었고, 바로 그 때문에 제 눈앞에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벤은 자신도 온전히 다니엘의 것이었음을 그 순간 깨달았다.
7
벤은 주사기에 약물을 가득 채웠다. 다니엘의 침대는 더 이상 다니엘의 침대가 아니었고, 바닥은 깨끗이 닦여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벤은 침대 위로 올라가 베개에 코를 박고 누웠다. 그리고 주삿바늘을 제 팔에 찔러넣고, 약물이 온 몸에 퍼지기를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다니엘이 혼자 지새던 밤, 잠 못 들었던 밤을 생각하며 벤은 자신이 그 모자람을 채워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빼앗았던 그 시간을 꼬박 채우면 다시 다니엘을 만날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벤은 내일 아침에도, 모레 아침에도 자신이 영영 깨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그것이 퍽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찌통아..ㅜㅜㅜㅜㅜㅜㅜ선생님 이렇게 날 울리고 가시는가요?ㅠㅠㅠ
답글삭제아..휘쇼설정 소름돋는다ㅠㅠㅠ 쫂쫂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