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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니엘은 햇살이 드는 따뜻한 마루에 누워 몇 개피째 인지 모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때는 고급스러웠을 마룻바닥은 담뱃재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고 수천달러를 호가할 카페트에서는 언제 쏟았는지 모를 와인 냄새가 진동했다. 고양이가 불만스러운듯 바닥을 긁었다. 지루한 오후였다.
그는 박살 난 노트북의 잔해 사이에 누워있는 중이었다. 소설은 진전이 없었고 찬장에는 설탕이 떨어졌다. 노트북을 부수는데는 그정도의 이유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편집실의 누군가는 그를 개새끼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를 싸이코패스라고 불렀다. 다니엘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다니엘의 앞에서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가 백 만부 이상 팔리는 책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초인종 소리는 다시 몇 번 정도 집 안을 울렸다. 이내 한참동안 울려대던 초인종 소리가 멈추더니 누군가가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한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선생님!"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다급한 얼굴로 거실로 달려들어와, 온갖 지저분한 잡동사니들 - 술병, 담배팩, 잡지, 심지어는 속옷과 쓰고버린 콘돔들 - 을 헤집고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는 마치 의식이라도 되는 양 다니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새로 생긴 상처를 모두 체크하기 시작했다.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그 청년은 단지 신입이라는 이유로 다니엘의 담당을 맡게 된 편집자 벤 휘쇼였다.
그리고 대게 다니엘을 담당하는 편집자들의 주된 일이란, 그가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약간의 집중장애와 심각한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은 집필중일때면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벌이곤 했다.
문득 조용해졌다 싶어서 들여다보면 피가 날때까지 혀를 깨물고 있다던가 하는건 아주 흔한 경우였다. (지난 6개월 동안 벤은 다니엘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막는데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혹은 병적인 거식증으로 카페인과 알콜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날이 일주일 넘게 계속된다던가, 그러고 나서는 어느 날부터 멀쩡하게 식사를 하는가 했더니 금방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내곤 한다던가. 이런 식이장애역시 곤란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해결해나갈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분을 이기지못하고 물건을 부순다거나, 얼굴이 하얗게 질릴때까지 스스로의 목을 조른다거나, 심장이 멎기 직전까지 욕조속으로 잠수한다거나... 그런일은 여전히 대처하기 힘들었다. 벤은 축 늘어진 다니엘을 욕조속에서 끌어낼때의 공포를 아직도 기억했다.
잠시 설탕을 사러 다녀 온 사이에 이런 꼴이라니. 벤은 다니엘의 얼굴에 생긴 생채기와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확인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다니엘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손은 겉으로는 엉망으로 보였지만 다행히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었다. 하루정도는 타이핑을 하지 못하겠지만 그건 벤이 대신 해 줄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니엘은 눈을 감고서 벤이 자신의 손을 조물거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곧 벤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손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기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니엘과 함께하고부터 벤의 하루하루는 넘치기 직전의 유리잔 같았다. 자신이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벤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반대로 다니엘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마른지 오래인 우물과 같았다. 오늘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었다.
다만 둘 다 동의컨데, 서로를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2.
흔히 사람들이 '작가'라는 직업에게 갖곤하는 왜곡된 이미지가 그대로 실체화 된다면 아마 다니엘 크레이그가 될 것이다. 거기에 자기파괴적인 폭력성과 깊이를 알수 없는 자기혐오를 더하면 완벽할 터였다. 다니엘은 노트북을 박살 낸 이후로 다소 지쳐보였다. 벤은 일찌감치 그를 침대로 데려가 재우려고 시도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다니엘은 고집스러운 태도로 계속해서 쓰겠다고 했다. 벤은 이토록 불안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인류애 넘치는 작품을 쓴다는 것에 대해 모순을 느꼈다.
두 사람은 오후 내내 글을 썼다. 다니엘은 한 줄을 읊고는 이내 집중력을 잃고 고양이를 쫓아가거나 했기 때문에 시간은 필요이상으로 많이 소모되었다. 벤은 다니엘이 말을 멈출때마다 그가 갑자기 울거나 하지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옆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니엘의 옆 얼굴로 쏟아지던 보기 드문 런던의 햇살은 점차 붉은 노을로 바뀌어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뺨 위로 길어진 그림자는 곧 완전한 어둠으로 바뀌었으며 두 사람은 노트북의 희미한 불빛에만 의지한 채 자정이 될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니엘은 나지막히 글귀를 암송했다. 시시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니엘은 이것이 별 것 아닌 양, 마치 형편없는 자서전의 일부인 양, 감정없는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벤은 부지런히 타이핑을 하면서도 몇 번이고 숨을 삼켜야했다. 지금 그가 타이핑 하고 있는 건 다니엘이 여태 썼던 것 중 최고의 걸작이 될 것이 분명한 대작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벤은 다니엘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던 날을 떠올리곤 했다. 그날 벤은 자신의 습작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열등감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무한한 존경심이 생겨났다. 그 무렵의 벤은 다니엘을 만날수만 있다면 그가 죽으라고 명령한데도 기꺼이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대 작가를 만났을 때, 다니엘이 입을 열어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 정말로 "꺼져, 죽어버려." 일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니엘은 한 챕터의 마무리를 남겨두고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 다른 것 같았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달래고, 어르고, 애원하고, 협박해가며 간신히 한 문단 한 문단을 쥐어 짜냈다. 아마 편집자로서의 사명보다는 소설의 뒷 내용이 궁금했던 탓이 더 컸다.
벤은 가까스로 마무리한 원고를 정리하며 다니엘을 향해 물었다. "식사는요?" 다니엘은 몇 겹씩 껴입은 옷가지와 몸에 둘둘 만 담요로 지저분한 바닥을 쓸며 부엌으로 향하더니 마시다 만 와인을 몇 병 끌어안고서 거실로 돌아왔다.
"난 이거면 됐어."
다니엘은 쇼파에 반 쯤 드러누운 채 병째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고 벤은 청소를 시작했다. 쓰레기와 찻잔과 옷가지와 책을 구분해서 치우던 벤은 어느 시점에서 그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는 걸 깨닫고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전부 다 쓰레기 봉투에 쑤셔담기로 했다.
세탁기를 작동시킨 후 거실로 돌아왔을 때 다니엘은 쇼파에서 잠들어있었다. 다행히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벤은 다니엘의 머리 밑에 조심스럽게 베개를 밀어넣고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벤은 그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매만져 준 뒤 시험삼아 다니엘의 귓가에 속삭여보았다.
"주무세요?"
다니엘은 깊이 잠든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혹시나 한 밤 중에 깨어날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소보다 감정소모가 심한 하루였고 이런 날 그가 어둠 속에서 혼자 눈을 뜨도록 내버려두는게 현명한 선택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벤은 다니엘의 집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3.
벤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창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공기는 싸늘했다. 카페트 위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있었던 그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서 '티오' 하고 작게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고양이는 부엌 어디에선가 야옹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벤은 어둠을 더듬고 일어나 부엌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어둠 속에서 낯익은 그림자와 마주했다. 그림자는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입에 물린 담뱃 불이 붉은 점처럼 보였다. 손에 감아두었던 붕대는 언제 풀어버렸는지 드러난 손은 얼룩덜룩한 피멍과 상처자국으로 가득했다. 벤은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티오에게 밥을 주고 나서는 찻주전자를 렌지에 올렸다. 그가 달그락거리며 차를 만드는 동안 벤은 그의 동선을 가만히 눈으로 쫓았다. 다니엘은 곧 두 잔의 차를 만들어 테이블로 가져왔다.
두 잔 이라는 점은 벤에게 있어서 퍽 중요했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다니엘을 사회화 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써왔다. 벤은 지금 자신의 몫으로 놓여진 차를 보며 그의 교육이 아주 쓸데없는건 아니었단걸 되새겼다. '그' 다니엘 크레이그가 자신을 위해 차를 만들어 줬다는 것. 부탁이나 강요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선의로.
벤은 이러한 비밀스러운 우월감이 자주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했다.
열성팬들이 보내온 편지를 봉투도 뜯지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 넣을 때나, 다니엘과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새벽이 오기전에 쓰레기와 함께 집 밖으로 내 보낼 때 특히 그랬다. 그들은 가엽게도 자신들의 노크가 언젠가는 다니엘에게 닿을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그들은 영원히 다니엘의 바깥에 머물것이다. 벤은 그 문을 아무에게도 열어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벤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어느새 불편할만큼 자라난 다니엘의 금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쯤 잘라줘야 할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창 밖에는 비가 내렸다. 벤은 창문을 열고서 차가운 겨울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비와 안개의 냄새가 났다. 시간은 새벽 5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새벽의 찬 바람과 마주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흡연욕구가 벤을 찾아왔다. 벤은 다니엘의 담배를 훔쳐 불을 붙였고 20여일의 금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벤이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다니엘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다니엘은 한 손으로 벤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는 벤의 어깨에 살짝 턱을 괴고 장난감을 조르듯이 물었다.
"만져도 돼?"
벤은 대답 대신에 어깨를 으쓱했다.
다니엘의 차가운 손이 벤의 옷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은 어떤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다니엘은 그저 난로앞으로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벤의 체온을 쫓아서 달라붙곤했다.
이전에 벤은 몇 번인가 자신의 침대로 들어오는 다니엘을 기겁해서 밀어낸 적이 있었다. 그가 어떤 성적인 의도나 기타 불순한 욕구를 갖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이후로 벤은 대게 다니엘이 자신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다니엘을 위해 청소를 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식사를 차리는 것과 다를것이 없는 어떤 직업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의 입술이 벤의 귓볼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이윽고 목덜미로 이어진 키스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벤의 어깨에 닿았다. 다니엘은 벤의 어깨에 입술을 붙인채로 기분 좋은듯 낮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벤은 얌전히 담배를 피우며 오늘의 스케쥴에 대해서 생각하려 노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4.
"잠수를 해봐야겠어."
다니엘은 완성한 챕터에 구둣점을 찍으며 말했다. 그 무렵 벤은 다니엘의 이름 앞으로 날아 온 고지서와 각종 초대장들을 분류하는 중이었다. 벤은 다니엘이 어떤 갑작스러운 발언을 하더라도 여태까지의 다른 편집자들처럼 '무슨소리세요?' 하고 멍청하게 되묻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벤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다니엘의 벤의 그 점을 항상 높이 샀다.
벤은 다니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뜸을 들이다가 작가협회에서 보내 온 시상식 초대장을 '버릴 것' 으로 분류하고 나서야 그를 쳐다보았다.
"다이빙 자격증 없으시잖아요."
"장비들은 필요없어. 물살이 강한 호수면 좋겠는데."
"안됩니다."
벤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단호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니엘의 수 많은 단점 중 하나는 사람의 말을 도저히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거였다. 다니엘은 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드러나는걸 보는게 즐거웠다. 벤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다니엘의 시선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다지 효과좋은 전술은 아니었다. 어느새 벤의 곁으로 다가와 앉은 다니엘은 벤의 뒷 목에 얼굴을 묻고서 보채듯이 "정말로 안돼?" 하고 속삭였다. 벤은 귀찮게 달라붙는 다니엘을 다시 한번 밀어냈다. 오늘의 다니엘은 얌전한 반면에 평소보다 다루기가 힘들었다.
"이 계절에 맨 몸으로 잠수를 할거라구요? 정 그러고 싶다면 친구가 많으셔야 될걸요."
"무슨 뜻이야?"
"순식간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될테니 기왕이면 양 쪽 모두에 친구가 있는 편이 좋겠죠."
벤은 쌀쌀맞게 말했다.
비 온 뒤 갑작스럽게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다니엘의 행동 반경은 점점 난로가 있는 거실 카펫 위로 한정되어 갔다. 벤에게 달라붙어 체온을 탐하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그는 지금도 벤의 손을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유독 추위를 타는 다니엘이 제 발로 얼음 같은 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분명히 작품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컸다. 어찌됐든 그건 틀림없이 미친짓이었고 다니엘이나 떠올릴 법한 생각이었다. 벤은 소설의 다음 전개가 궁금해졌다.
"레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나요?"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방금 작업을 끝낸 원고가 담긴 노트북을 벤에게 밀어보였다. 반짝이는 커서 아래에 놓여진 단어 한 개가 벤의 눈을 사로잡았다.
'missing.'
벤은 자신이 소설 속의 인물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걸 일찍이 인정했다. 레이는 쫓기고 내몰리고 사냥당한 후 차가운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끝없이 가라앉아 바닥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공식적으로 실종되었다. 모든 과정은 지독하고 냉정했다. 벤은 자신이 지금 읽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벤의 수 많은 장점 중 하나는 프로의식이 뛰어나다는 거였고 '이전에 이런 얘기 한 적 없으셨잖아요!' 하고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겨우 자신을 참아냈다. 대신에 벤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불을 붙였다.
"설득력이 부족해. 직접 물 속에 들어가봐야겠어."
그리고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소설에 대해 조금 따분한 듯, 관심없는 누군가의 꿈 이야기를 하는 듯,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담배 연기 사이로 바라보며 심장의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오래전에 자기 손으로 불태워버린 어떤 감정의 존재감을 느꼈다. 죽어버린 줄 알았더니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새 것 같은 그 감정. 벤은 자신의 열등감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벤은 다니엘이 한밤의 호수가에 서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소설속의 레이처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벤을 향해 잠깐 뒤돌아 보더니 이내 각오한 듯 천천히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처럼 깊어지지 않던 수위가 어느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물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충분한 설득력이 생길 때까지 오래 잠수했다.
벤은 이 이미지에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고 병신같은 아이디어였다.
"실내 시설을 대여해보죠." 벤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끄며 말했다. 다니엘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의 투정은 하지 않았다.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그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는 동안 다니엘은 벤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트 소매 밖으로 반 정도 드러난 섬세한 그 손은 서류와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더니 우아한 움직임으로 코트의 단추를 잠그고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앞 머리카락을 살짝 다듬고 옷 매무새를 만지더니 곧 벤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벤에게 다가가 그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벤의 손을 끄집어 내더니 자신의 손 끝과 얽어들어갔다. 다니엘은 우스울만큼 진지한 태도로 벤의 손과 깍지를 끼고서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자고 가."
오늘의 다니엘은 정말이지 평소보다 다루기가 힘들었다. 벤은 오늘 하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니엘을 밀어냈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다니엘은 배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새벽 2시, 벤은 응급실로부터 다니엘이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 자신의 풀장에 뛰어들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5.
"죽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벤은 다니엘의 얼굴에 까슬까슬하게 자라난 수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니엘의 의식은 어두운 바닥에 잠들어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난 이틀동안 다니엘은 아주 잠깐씩 의식을 회복했다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잠시나마 눈을 뜬 몇 초 동안에도 그는 현실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하는 듯 했다. 다니엘은 의미 없는 몇 마디의 단어를 꿈처럼 중얼거리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몇 번의 정밀 검사를 했지만 그의 뇌에는 문제가 없었다. 운 좋게도 육체적 손상은 오른쪽 폐의 염증으로 그쳤다. 뇌에 외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건 아마도 정신적인 문제일 터였다.
벤는 다니엘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몸 중에서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곳들을 손 끝으로 하나하나 탐색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다니엘의 발등 위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바지를 걷어올리며 발목을 지나 무릎 뒤쪽까지 만져올라갔다. 벤은 다니엘의 무릎 뒤에 숨어 잘 보이지않는 흉터를 더듬어 확인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만나기 훨씬 전에 생긴 흉터였고 벤은 언제나 그것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몸에는 벤이 잘 알고있는 상처도 많았다. 벤은 다니엘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끌어올렸다. 팔뚝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화상자국이 붉게 남아있었다. 벤은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상처 위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이것은 난롯불을 쳐다보던 다니엘이 무의식중에 그 속으로 팔을 집어 넣었을 때 생긴 상처였다.
"..화상은 아주 오래 남지. 난 당신이 이 흉터를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떠올려주길 바랬어."
벤은 잠들어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벤은 영원히 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건 없으니까.
다니엘이 깨어난 건 3일째의 아침이었다. 벤이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다니엘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치 설핏 잠이 들었다가 짧은 꿈을 꾸고 깨어난 사람처럼 그곳에 있었다. 다니엘의 파란 눈동자는 멍하니 벤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다시 스르륵 감겼다. 벤은 그가 다시 의식을 잃을까봐 깜짝놀라 다니엘을 흔들어 깨웠다.
"선생님, 잠들지 마세요!"
벤은 다니엘을 일으키기 위해 그의 팔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병실은 한여름처럼 더운 온도로 맞춰져 있었지만 그는 추위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떨고있었다. 벤은 다니엘의 손을 쥐어서 입으로 가져가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벤의 생각엔 무언가가 그 순간 다니엘을 붙잡아 준 것 같았다. 벤은 다니엘의 손가락에 작은 키스를 했다. 그리고 손바닥에도, 손목에도 키스했다. 다니엘의 떨림이 천천히 멈추었다. 벤은 다니엘의 어깨를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듯이 토닥여주었다.
시간은 몹시 느리게 흘렀다. 벤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다니엘을 안고서 피로와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대로 아무것도 더 나빠지거나 나아지는일 없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벤은 영원히 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건 유리로 만든 장미처럼 아름답고도 부서지기 쉬운 말이었다.
6.
퇴원한 이후 다니엘은 전례가 없을만큼 얌전하게 지냈다. 그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금연을 시작했고 세끼 꼬박꼬박 밥을 먹었다. 처방받은 수면제 또한 몰래 토해내는 일 없이 잠자코 복용했으며 그 덕분에 다니엘은 벤이 아는 한 처음으로 하루에 5시간 이상 씩을 잤다. 다니엘은 불평 없이 하루종일 글을 썼고 자주 웃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니엘은 단 한 번도 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검은 색이 나을까요?"
벤은 세탁소에서 찾아 온 다니엘의 수트를 침대 위에 펼쳐놓고 수십 분째 넥타이 색을 결정하지 못해서 고민중이었다. 검은 색의 맞춤 정장에는 어떤 색의 넥타이도 잘 어울렸지만 벤은 최대한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다니엘은 깨끗하게 다려진 흰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한참동안 커프스 단추와 씨름하던 다니엘은 결국 포기하고 벤에게 팔을 내밀었다. 벤은 그의 양 쪽 팔목 모두에 단추를 채워주고 소매 단을 손 끝으로 다듬었다. 최근 들어 체중이 조금 늘긴 했지만 셔츠는 그의 몸에 딱 맞았다.
벤이 계속해서 넥타이 색을 고민하는 동안 다니엘은 바지를 입고 벨트를 채웠다. 벤은 그러한 다니엘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다가 검은 색 넥타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에 넥타이를 두르고 한 바퀴 매듭을 지었다.
"역시 검은 색이 낫네요."
벤은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의 매듭을 완성지었다. 마지막으로 벤은 다니엘의 어깨에 떨어진 가느다란 금발 머리카락을 몹시 신중한 표정으로 떼어냈다. 벤은 자신의 손가락이 다니엘의 옷을 더럽히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살짝 머리카락을 집어 작은 호흡과 함께 멀어져갔다. 벤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는 다니엘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모른척 했다. 벤은 다니엘에게 윗 옷을 입히고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리고 향수를 뿌린 후 다니엘의 귓가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았다. 완벽했다. 외출 준비가 모두 끝났다.
다니엘은 어제 벤에게 여태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었던 연말 시상식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벤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주최측에 참석을 희망한다는 답신을 보내고 옷을 준비했다. 그리고 수상을 대비해 다니엘을 대신해 짧은 연설을 썼다. 서너줄 정도의 짧은 감사 연설에 벤의 이름은 없었다. 벤은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집중장애가 있는 다니엘을 2시간가량 이어지는 시상식에 얌전히 앉혀두기 위해서는 약간의 알콜이 필요했다. 벤은 다니엘이 끝없이 샴페인을 마셔대는걸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문불출의 천재작가 다니엘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건 거의 처음이었기에 그날 행사의 중심은 단연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몇 명째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고, 다행히도 얌전히 웃었고, 사람들이 가져오는 책 마다 사양없이 싸인을 해주었다. 벤은 그것이 알콜 덕분인지 아니면 최근 다니엘이 보여주는 비정상적일 정도의 평범한 모습 덕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 됐든간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벤은 완벽한 수트 아래에 숨어있는 다니엘의 흉터 투성이 몸을 생각했다. 그리고 벤의 허리를 감아오던 진득한 팔과 끊임없이 부딪혀오던 버릇없는 입술을 생각했다. 그것이 벤이 생각하는 진짜 다니엘이었다. 벤은 다니엘의 반듯한 옆 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다니엘은 올해도 당연히 수상 이력에 한 줄을 더 추가하게 되었고 예년과는 다르게 직접 상을 수상했다. 그는 열성적인 환호와 함께 무대 위에 올라 벤이 적어준 연설을 그대로 읽었다. 그리고 그 서너줄 정도의 짧은 감사 연설에 벤의 이름은 없었다. 벤은 그것이 당연히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니엘이 편집장의 이름과 소속 에이전트 직원 몇 명의 이름을 불렀을때,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의 가족 이름과 아주 미미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동료 작가 몇 명의 이름을 불렀을때,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 감사 인사가 청중들의 박수를 이끌어 낼 때.
그 연설은 벤이 적어준 그대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벤은 자신의 이름이 그 곳에 없다는 것에 문득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이름들 중 그 누구도 자신보다 다니엘을 알지 못했다. 벤은 말 그대로 다니엘의 머리 끝 부터 발 끝까지 모든 것의 이유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다니엘의 분노와 고통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지켜보았으며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가장 먼저 알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무대 위의 다니엘에게 다가가 꽃을 건냈다. 그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쌓인채 애프터파티를 위해 무대 뒤로 떠났다. 벤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어디선가 닫혀진 문이 두들겨 열리는 소리를 들은 듯 했다. 그는 자신이 그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설마 다니엘이 먼저 그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올거라고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7.
벤은 운전대에 이마를 기대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서는 폭설로 인한 도로의 정체가 새벽까지 이어질거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라디오 채널을 돌리자 어느 채널에서도 모두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댔다. 벤은 라디오를 껐다. 차 속에 갇혀있는 몇 시간 동안 눈은 끝없이 내렸고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뒷좌석에서 울고 있었다.
다니엘은 시상식에서는 물론, 후에 이어진 애프터파티에서도 내내 기분이 좋았고 심지어는 약간 들떠 있는것처럼 보였다. 벤은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약 먹을 시간이 지난지 오래였다.
벤은 다니엘의 옷깃을 붙잡고서 선생님, 잠깐만요, 하고 몇 번이나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귀찮은듯 건성으로 대답할 뿐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벤은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니엘의 귓가에 약 먹을 시간이 되었다고 속삭였다. 다니엘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내리며 벤을 쳐다보았다. 그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한 번에 비우고 벤의 귓가에 대답했다. 오늘 밤엔 수면제 대신에 알콜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동안 한 번도 약을 빼먹지 않았던 다니엘은 오늘 처음으로 약을 거부했다. 한 번이라도 거르면 내성을 키우게 될 거라는 벤의 잔소리는 아무래도 통하지 않았고 다니엘은 못들은 척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금새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벤은 다니엘에게 한마디를 더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대신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약병을 손으로 꽉 쥐었다.
사소한 문제가 생긴 건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다니엘의 행동을 지켜보던 벤은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게 그의 말 수가 적어졌단 걸 눈치챘다. 다니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더이상 잘 웃지 않게 되었다. 엄지 손톱을 물어 뜯기 시작했고 불안한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했다. 그러다가 그가 태엽이 멈춘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서서 아무와도 눈을 맞추지 않게 됐을 무렵에, 주위의 사람들이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미스터 크레이그?" 하고 그에게 걱정스레 말을 걸기 시작했을 무렵에, 벤은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너무 취했네요."
벤은 다니엘에게 손을 내밀었고 다니엘은 그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 사이에 창백해진 다니엘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어려있었다. 벤은 다니엘을 부축해 천천히 파티장 밖으로 이끌었다. 비틀거리기 시작한 다니엘은 계속해서 주저앉으려 했고 벤은 몇 번이고 그를 일으켰다. 그는 정말로 취한 사람처럼 보였기에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같은 얼굴을 하고서 벤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정말 싫어, 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지만 벤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벤은 그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간신히 그를 걷게 했다.
주차요원이 차를 찾아 올때까지 다니엘은 벤에게 매달려있었다. 그는 싫다는 말만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곧 차가 도착하자 벤은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다니엘을 억지로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벤은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몇 분 되지않아 다니엘은 갑작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벤은 놀라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이 먹는 수면제에 항우울제도 포함되어있다는 걸 몰랐다. 벤이 여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집에 도착하는 네 시간 내내 울었다. 그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밸런스 붕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자동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벤은 아직도 반 쯤 탈진한 채로 울고 있는 다니엘을 차에서 끌어냈다. 다니엘은 두 발로 똑바로 서지 못하고 이내 새로 쌓인 하얀 눈 위로 쓰러졌다. 그는 눈 위에 엎드린채로 숨 쉬듯이 흐느꼈다.
"선생님, 일어서세요."
벤은 그를 일으키는 대신에 조용히 말했다. 다니엘은 벤의 말에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넘어졌다. 그러나 벤은 도와주지 않았다. 다니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벤을 올려다 보았다. 벤은 혼자서 걸어가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네 발로 기다시피 몇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다니엘은 울면서 눈 속을 기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돌아보고는 다시 다가와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양 팔을 넣고 일으켰다. 다니엘은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고 벤에게 기대섰고 두 사람은 눈 속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벤은 다니엘을 방으로 데려가 겉옷만 벗긴 채 침대에 눕혔다. 다니엘은 숨을 몰아쉬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있었다. 벤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다니엘의 앞에서 달칵달칵 하고 흔들었다. 다니엘은 그 소리에 눈을 뜨고 벤을 쳐다보았다. 벤은 다정하게 말했다.
"약을 드시면 괜찮아 질거에요."
다니엘은 절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벤은 약통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약통은 데구르르 굴려 어딘가 벽장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다니엘은 너무 울어서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힘겹게 뜨고 다시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벤은 자신의 코트와 자켓을 벗어 떨어트렸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다가가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벤은 다니엘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전 그걸 바라지 않아요."
벤은 하얗게 드러난 다니엘의 목 위에 키스했다.
다니엘은 벤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 몸을 달려 발 끝까지 도착하는 걸 느꼈다. 그는 벤의 옷자락을 손아귀가 하얗게 될 때까지 움켜쥐었다. 다시금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에너지는 완전히 바닥났다. 그의 손 안에서 벤의 옷자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벤은 다니엘의 목에 입술을 갖다대고서야 그의 피부가 데일듯이 뜨거워진 것을 알았다. 열로 들뜬 살에서는 보송보송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벤은 그 향기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다니엘의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 없이 축 늘어진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벤은 다니엘의 비싼 수트와 셔츠 아래에 숨겨져있는 뜨거운 몸을 생각했다. 그 속에서 뛰고있는 심장을 생각했다.
벤은 자신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8.
"선생님, 제 말 들리세요?"
다니엘은 자꾸만 감겨드는 눈을 힘겹게 다시 떴다. 그의 불투명한 시야에 희고 아름다운 것이 아른거렸다. 그건 다니엘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는 벤의 손이었다. 다니엘은 습관처럼 그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벤의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다니엘의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다니엘은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전혀 움직이지 못한채 그저 눈만 흐릿하게 깜빡였다. 온 몸이 너무도 무거웠다. 피부가 한뼘 한뼘 드러날때마다 추위가 그를 덥쳐왔다.
벤은 다니엘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내리고 그의 양 발목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치 점자를 읽듯이 집요하고 지독하게 다니엘의 피부 위를 손 끝으로 훑어나갔다. 발목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까지, 배꼽과 쇄골을 가로질러 턱까지. 다니엘의 몸은 벤이 익히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으나 평소와 달리 펄펄 끓는 듯한 피부의 열기는 새삼 모든 것을 낯설게 했다. 벤은 차가운 손바닥을 다니엘의 배에 얹었다. 그의 손은 다니엘의 호흡과 함께 조용히 오르내렸다. 벤은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대답하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깊이 잠든 사람처럼 고른 숨을 쉬며 축 늘어져있을 뿐이었다. 간혹 깜빡이며 열리는 푸른 눈동자만이 그가 의식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벤은 다니엘의 허벅지 안쪽 부드럽고 연한 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 안 가득 살을 쥐고 아플만큼 꽈악 쥐었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하는 동안 다니엘의 호흡은 조금씩 가빠졌고 배의 오르내림 역시 조금 빨라졌다. 벤은 다정하게 말했다.
"좋아해서 이러는거에요."
벤은 예고없이 다니엘의 입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난 몇 시간동안 너무 울어서 붓고 헐어버린 점막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는 다니엘의 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손톱으로 내키는만큼 상처입혔다. 그는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다니엘의 다리를 벌리고, 뒤쪽의 좁은 구멍에 피와 침으로 젖은 손가락 두개를 집어넣었다. 다니엘의 온 몸의 힘이 빠진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들어갔다. 벤은 안쪽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마찬가지로 내키는만큼 손톱으로 상처입히고, 벌리고, 손가락을 늘려 나갔다. 다니엘의 반쯤 뜨인 시선은 아무런 의사나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머나먼 꿈같은 통증이 지나갈 때마다 깜빡 하고 감겼다가 열리곤 했다. 벤은 다니엘이 버진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능한 한 처음이었으면 했다. 적어도 이런식으로 하는 건 처음이었으면 했다. 벤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 위에 침을 뱉았다. 그리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다니엘의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땀과 피와 침으로 젖은 구멍은 충분히 매끄러웠고 다니엘은 일말의 거부의 몸짓도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의 호흡은 아주 조금 더 빨라졌고 창백한 피부 위로 붉은 색이 번져나갔다. 목 울대가 울렁거렸고 귀 끝과 코 끝은 빨갛게 물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잠든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벤은 발기하지 않은 다니엘의 성기를 손 안에 쥐고 자극했다. 오늘 다니엘은 금방 발기하기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너무 많이 지쳐있긴 했지만 온 몸의 점막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자극에 민감했다. 다니엘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벤,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벤은 서두르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건 믿기지 않을만큼 힘든일이 되었다. 벤은 다니엘의 허리를 잡고 바싹 끌어당겼다. 맞닿은 곳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은 더 이상 틈이 없을만큼 깊이 이어졌다. 벤은 다니엘의 안쪽이 생리적으로 오므라들며 조여오는걸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다니엘의 허리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다니엘은 벤의 이름을 딱 한 번 불렀던 이후로 다시는 말을 하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가쁜 숨소리만이 둘 사이를 오갔다. 버틸 힘이 없었던 다니엘은 벤이 세게 움직일때마다 점점 뒤로 밀려나갔고 벤은 다니엘의 양 손목을 쥐고 잡아당기며 허리를 움직였다. 얼마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벤은 사정감이 찾아 온 다니엘의 뜨겁고 부들부들한 내벽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꼈지만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니엘은 젖은 눈을 들어 벤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담긴 애원을 읽었지만 벤은 그렇게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정말, 좋아해서 이러는거에요."
벤은 허벅지가 아릿하게 아파 올 정도로 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강하게 움직였고 허공에 들린 다니엘의 다리는 벤의 움직임에 따라 힘 없이 흔들렸다. 다니엘의 숨소리는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갔고 곧 울음소리로 변했다. 다니엘은 어린아이처럼 딸꾹질을 하며 엉엉 울어댔다. 어느샌가 다니엘은 자신의 배 위에 사정했지만 스스로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내벽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조여들었고 박자에 맞춰서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윽고 다니엘의 울음이 점점 멎어들고 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 벤은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여자를 임신시키듯이 깊숙히 사정했다. 정말로, 좋아해서 그런거에요. 벤은 같은 말을 되뇌었다. 정말이에요. 벤은 아직까지 쥐고있던 다니엘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니엘의 손목에는 시뻘건 자국이 남았다.
다니엘은 문득, 자유로워진 손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이 천천히 침대 위를 더듬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오늘 밤 다니엘이 보여준 자발적인 첫 움직임이었다. 다니엘은 곧 자신의 옆에 놓인 벤의 손을 찾아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벤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들었다. 그는 몹시 느리게, 하지만 확실한 의지로 벤의 손에 깍지를 꼈다. 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다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를 말했다.
"..자고 가."
그리고 다니엘은 기절과도 비슷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벤은 두 사람의 손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9.
다니엘은 짧은 꿈에서 깨어 새벽에 눈을 떴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불면증은 오늘 같은 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곁에 잠들어 있는 벤이 깨지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모포를 몸에 두르고 어두운 거실로 걸어나갔다.
다니엘은 최근들어서 벤에 관한 꿈을 많이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주로 벤을 모욕하고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지고 제 화를 못이겨 자해를 했다. 꿈의 끝에서 이상하게도 벤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과하는 건 벤이었다. 다니엘은 잠에서 깨고나서 한참후에야 그것이 꿈이 아니라 기억의 일부란 걸 깨닫곤 했다. 벤이 여태 다니엘을 위해 해 온 일들은 '헌신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는 편집자로서 다니엘에게 마감일을 지키도록 만들었고 온갖 귀찮은 일들을 소리없이 해결했으며 심지어는 보모 노릇까지 했다. 게다가 그는 6개월 이상 큰 문제없이 다니엘과 함께 일했다. 그건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열이 내린 몸은 나른하고 가벼웠다. 창 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렸다. 다니엘은 차가운 마룻바닥을 맨 발로 밟으며 깜깜한 집 안을 하릴없이 거닐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 집 구석구석에 벤의 꼼꼼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었다. 찬장의 그릇과 찻잔은 날이 갈수록 숫자가 불어났다. 다니엘이 하나를 깨부수면 벤은 늘 두 개를 사왔기 때문이었다. 모든 방의 잠금장치는 제거되어 있었고 가구의 모서리는 천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구급상자 안에는 반창고보다 지혈제가 더 많았다. 벤은 아마도 매일매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벤과 함께 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다니엘의 행동이나 말에 의문을 품는 대신에 한결같이 '네' 혹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던 성실한 편집자. 도망치는 대신에 기꺼이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던 검은 머리카락의 어린 남자. 벤 휘쇼라는 사람.
벤이 긴 꿈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높이 떠있었고 다니엘이 누워있던 자리에는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니엘을 찾았지만 집 안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벤은 문가에 서서 집 바깥을 둘러보다가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발견했다. 벤은 서둘러 옷을 껴입고 그것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발자국이 향한 곳은 마당의 작은 정원이었다.
세상은 온통 하얗고 순결했다. 발자국의 끝에는 눈 덮인 벤치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 웅크려앉은 다니엘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 얼어붙은 장미 넝쿨이 저만치 보였다. 벤은 그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어젯밤 저지른 일에 대해 짓눌리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벤은 다니엘의 뒤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용기를 내어 한 마디를 하는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 날씨가 추워요."
다니엘은 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보고 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푹 눌러쓴 모자와 칭칭감은 목도리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다니엘의 얼굴은 아직도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 엉망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르고 파랗게 질린 얼굴. 얼마나 오래 나와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속눈썹에 하얗게 얼음이 엉겨붙을 정도로는 오래 앉아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맨 발이었다. 벤은 다니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손으로 감싸쥐어 품에 안았다. 다니엘은 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채로 말했다.
"몇 번인가 널 해고하려고 했었어."
벤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겉 옷을 벗어 다니엘의 다리 위에 덮어주고 그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다니엘은 그런 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미안해."
다니엘은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은듯이 말했다. 하지만 벤은 그의 말에 심장이 멈출 뻔 했다. 벤은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추위에 붉어진 다니엘의 뺨위로 투명한 것이 떨어졌다. 다니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리더니 곧 손가락 틈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줘."
다니엘은 얼굴을 가린 채 정말로 미안한듯이 훌쩍훌쩍 울었다. 벤은 어째서 그가 사과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벤은 다니엘의 손목을 잡아당겨 억지로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울어서 더욱 못생겨진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다니엘의 새파란 눈동자는 하얀 눈 속에서 더욱 선명했다. 그가 숨을 몰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벤은 다니엘의 상처나고 갈라진 입술 위에 짧은 키스를 했다. 벤은 문득 이것이 둘의 첫 키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붉어질데가 없다고 생각했던 다니엘의 뺨이 점점 더 빨갛게 변했다.
벤은 다니엘과 함께 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불 속에 몸을 집어넣거나 물 속으로 뛰어들곤 했던 작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자신의 글을 유일하게 맘에 들어 하지 않았던 남자.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사람. 미안해요, 하고 벤은 다니엘의 귓가에 말했다. 그리고 아마 그 누구도 그에게 해 준 적 없을 말을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괜찮아요.
두 사람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눈 속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댄 채 한 번도 하지 못한 얘기들을 했다. 다니엘은 끝없이 사과했고 벤은 끝없이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말이 멈출 때마다 키스를 하고 다니엘은 간혹 울거나 웃거나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어느 새 햇살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니엘은 난로 옆에서 콜록콜록 연신 기침을 하며 쓰다 만 원고를 읽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펼치고는 언제나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
벤은 오래전부터 줄곧 다니엘에 관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다니엘은 햇볕이 드는 거실에서 하루종일 글을 썼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벤의 옷 속에 손을 집어 넣고 어린아이처럼 짧은 잠을 잤다. 이것은 벤의 가장 행복한 기억의 일부였다.
10. 외전
다니엘은 거짓말에 능숙했다. 그는 한 숨도 못 자거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핑계를 적당히 잘 꾸며냈다. 역겨운 기분을 숨긴채 오르가즘을 흉내 내는데 익숙했고 손목의 베인 듯한 상처는 단순한 사고로 인해 생긴거라고 흔히 의사를 속였다. 다니엘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자신의 새로운 편집자가 될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니엘이 원했던대로 어리고, 경험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며...
"..그런데 내 팬이라고?"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수화기 너머로 당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더군요. 싫으신가요?'
"정말 싫은데."
아마도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바람에 다니엘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을 가여운 여직원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그는 뜨겁게 데워진 욕조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몸을 뉘였다. 따뜻한 물이 온 몸을 감싸오자 그는 평소답지 않게 기분이 약간 너그러워졌다. 약간의 호의를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크게 선심쓰듯 말했다. '일단 한 번 만나보지 뭐.'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여직원은 황송해서 죽겠다는 취지의 감사인사를 몹시 길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니엘은 온 몸에 묻은 핏자국을 물에 씻어 내렸다. 수증기 아래 하얗게 드러난 피부는 찰과상과 피멍으로 엉망이었다. 어젯 밤 누군가와 싸웠던 기억은 있었지만 그곳이 어디였는지, 무슨 이유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대는 피투성이였고 바닥엔 헤로인 주사기와 술 병이 나뒹굴고 있었으므로 아마 상대방은 약에 취해있었고 자신은 술에 취해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문득 자신 보다 훨씬 크고 억센 손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을 끌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다니엘은 이것이 정말로 어제의 기억인지, 혹은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상처에 물이 닿자 곧 통증이 퍼져나갔다. 다니엘은 그 아릿한 통증이 맘에 들었다.
다니엘이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물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법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다니엘은 욕조에서 일어나 수건을 찾았다. 하지만 깨끗한 수건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자 혼자서 조금 짜증을 내고,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 가까워진 계절이긴 했지만 런던의 날씨는 여전히 싸늘했기에 그는 양 팔로 어깨를 감싸쥐고 살짝 떨었다. 다니엘은 알몸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리고, 문 밖에서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안에 계시죠?"
다니엘은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며 동시에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있는 어린 남자는 오래 연습한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과 공손한 미소, 신중한 눈빛. 하지만 그의 정교한 표정은 알몸의 다니엘을 발견한 순간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남자는 할 말을 잃고 굳어버린 듯 다니엘의 젖은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의 하얀 나신은 마치 어둠 속에 창백한 불이 켜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어쩔줄 몰라하다가 엉겁결에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남자의 뒤에서 문이 탕 하고 닫혔다.
다니엘은 팔짱을 끼고서 자신의 새로운 편집자를 관찰했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어리고, 경험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지만, 원치않게도 다니엘의 팬인 남자.
"...들으셔서 알겠지만 오늘부터 선생님의 새로운 담당이 된 벤자민 휘쇼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벤자민이라고 말한 남자는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하며 준비한 한 마디를 간신히 입 밖에 꺼냈다. 다니엘은 벤의 얼굴에 떠오른 혼란과 당혹을 지켜보며 본의 아니게 즐거움을 느꼈다. 날 좋아한다고 했었지. 졸업 논문으로 내 소설에 관해서 썼다고 했어. 다니엘은 장난삼아 벤에게 천천히 한 걸음 다가갔다. 이에 당황한 벤은 도망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동시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벤은 문에 등을 부딪히고서야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다니엘은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팔을 들어 벤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다니엘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 방울이 벤의 얼굴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벤은 그 차가움에 흠칫하고 놀라 다니엘의 몸을 확 밀어냈다. 다니엘이 멀어지자 그의 몸에서 나던 달콤한 비누향도 함께 멀어졌다. 다니엘은 조금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서서 벤을 내버려 두고 걸어갔다. 벤은 그의 흰 피부위에 남아있는 붉은 상처에 시선이 못박혔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가빠진 숨을 눈치 채지 못하고 어쩐지 숨쉬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다시 욕실로 돌아가 미지근한 욕조 속에 몸을 첨벙하고 담갔다. 벤은 물 소리를 듣고 쭈뼛쭈뼛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다니엘은 몹시 다정한 목소리로 짧게 두 마디를 말했다. "죽어, 꺼져버려." 벤은 무언가가 크게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참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죽거나 꺼져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꾹 참고 그 자리에서 다니엘을 기다렸다.
간간히 들려오는 첨벙거리는 물 소리 외에는 다니엘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벤은 자신이 부쩍 나이를 먹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다가 집 꼴이 엉망인걸 보고 널부러진 옷가지와 수건을 주워 모았다. 겸사겸사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내친김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다음 바닥 청소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벤은 다니엘의 침실을 치우기 위해 들어갔다가 3초 만에 소리없는 비명과 함께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무리 벤이라 해도 거기까지 면역이 생기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다니엘이 누운 욕조 속의 물은 이제 완전히 차가워졌고 그의 집은 점점 깨끗해졌다.
물 놀이에 질린 다니엘이 다시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벤은 서랍장에서 찾아 낸 깨끗한 타월 몇 장을 들고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당연한 듯이 다가와 다니엘의 어깨에 수건을 둘러주고 그의 머리 위에도 수건을 얹어주었다. 다니엘은 그 자리에 서서 벤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주는 걸 내버려 두었다. 벤의 표정에는 더이상의 불확신은 없었다. 연습했던 미소나 공손함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금 화난듯한 얼굴을 하고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태도를 취했을 뿐이었다. 다니엘은 벤의 불만에 찬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팔을 뻗어서 아까처럼 벤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벤은 그의 몸이 추위에 달달 떨리고 있다는 걸 알고 이번에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고양이털 알러지 있어?"
다니엘은 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서 물었다. 벤은 다니엘의 식은 몸을 타월로 감싸 안고서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다니엘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벤은 다니엘의 새로운 편집자가 되었다.
다니엘은 거짓말에 능숙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어하면서도 사람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밀어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쉽게 부수었다. 다니엘은 정말로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 할 때는 어떤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를 붙잡고 싶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난 후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를때까지, 다니엘은 벤의 옷깃을 쥐었다가 그가 눈치채기 전에 슬쩍 놓아주기를 오랫동안 반복했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안달이 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때때로 어린아이처럼 열이 올랐다. 벤은 열이 펄펄 끓는 다니엘의 곁을 밤새 지키면서도 그가 앓는 열병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1.
다니엘은 햇살이 드는 따뜻한 마루에 누워 몇 개피째 인지 모를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한때는 고급스러웠을 마룻바닥은 담뱃재에 그을린 자국이 가득했고 수천달러를 호가할 카페트에서는 언제 쏟았는지 모를 와인 냄새가 진동했다. 고양이가 불만스러운듯 바닥을 긁었다. 지루한 오후였다.
그는 박살 난 노트북의 잔해 사이에 누워있는 중이었다. 소설은 진전이 없었고 찬장에는 설탕이 떨어졌다. 노트북을 부수는데는 그정도의 이유면 충분했다. 그렇기에 편집실의 누군가는 그를 개새끼라고 불렀고 누군가는 그를 싸이코패스라고 불렀다. 다니엘은 그들의 의견에 동의했기에 크게 불만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도 다니엘의 앞에서는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가 백 만부 이상 팔리는 책을 꾸준히 쓸 수 있는 작가이기 때문이었다.
초인종이 울렸다. 다니엘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초인종 소리는 다시 몇 번 정도 집 안을 울렸다. 이내 한참동안 울려대던 초인종 소리가 멈추더니 누군가가 열쇠로 문을 따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한 발자국 소리가 이어졌다.
"선생님!"
검은 머리카락의 청년은 다급한 얼굴로 거실로 달려들어와, 온갖 지저분한 잡동사니들 - 술병, 담배팩, 잡지, 심지어는 속옷과 쓰고버린 콘돔들 - 을 헤집고 다니엘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곁에 무릎을 꿇고는 마치 의식이라도 되는 양 다니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새로 생긴 상처를 모두 체크하기 시작했다.
아직 학생티를 벗지 못한 그 청년은 단지 신입이라는 이유로 다니엘의 담당을 맡게 된 편집자 벤 휘쇼였다.
그리고 대게 다니엘을 담당하는 편집자들의 주된 일이란, 그가 자해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었다.
약간의 집중장애와 심각한 분노조절장애를 가지고 있는 다니엘은 집필중일때면 때때로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을 벌이곤 했다.
문득 조용해졌다 싶어서 들여다보면 피가 날때까지 혀를 깨물고 있다던가 하는건 아주 흔한 경우였다. (지난 6개월 동안 벤은 다니엘의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어서 혀를 깨물지 못하도록 막는데에 어느정도 익숙해졌다.)
혹은 병적인 거식증으로 카페인과 알콜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는 날이 일주일 넘게 계속된다던가, 그러고 나서는 어느 날부터 멀쩡하게 식사를 하는가 했더니 금방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해내곤 한다던가. 이런 식이장애역시 곤란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해결해나갈수 있었다.
다만 이렇게 분을 이기지못하고 물건을 부순다거나, 얼굴이 하얗게 질릴때까지 스스로의 목을 조른다거나, 심장이 멎기 직전까지 욕조속으로 잠수한다거나... 그런일은 여전히 대처하기 힘들었다. 벤은 축 늘어진 다니엘을 욕조속에서 끌어낼때의 공포를 아직도 기억했다.
잠시 설탕을 사러 다녀 온 사이에 이런 꼴이라니. 벤은 다니엘의 얼굴에 생긴 생채기와 피가 줄줄 흐르는 손을 확인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은 다니엘이 아직 숨을 쉬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기로 했다. 손은 겉으로는 엉망으로 보였지만 다행히 부러지거나 한 곳은 없었다. 하루정도는 타이핑을 하지 못하겠지만 그건 벤이 대신 해 줄수 있는 부분이었다.
다니엘은 눈을 감고서 벤이 자신의 손을 조물거리도록 내버려두었다. 곧 벤이 구급상자를 가져와 손을 소독하고 붕대를 감기시작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다니엘과 함께하고부터 벤의 하루하루는 넘치기 직전의 유리잔 같았다. 자신이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벤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반대로 다니엘에게 있어서 하루하루는 마른지 오래인 우물과 같았다. 오늘은 어제와 같았고 내일은 오늘과 같을 것이었다.
다만 둘 다 동의컨데, 서로를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2.
흔히 사람들이 '작가'라는 직업에게 갖곤하는 왜곡된 이미지가 그대로 실체화 된다면 아마 다니엘 크레이그가 될 것이다. 거기에 자기파괴적인 폭력성과 깊이를 알수 없는 자기혐오를 더하면 완벽할 터였다. 다니엘은 노트북을 박살 낸 이후로 다소 지쳐보였다. 벤은 일찌감치 그를 침대로 데려가 재우려고 시도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다니엘은 고집스러운 태도로 계속해서 쓰겠다고 했다. 벤은 이토록 불안정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인류애 넘치는 작품을 쓴다는 것에 대해 모순을 느꼈다.
두 사람은 오후 내내 글을 썼다. 다니엘은 한 줄을 읊고는 이내 집중력을 잃고 고양이를 쫓아가거나 했기 때문에 시간은 필요이상으로 많이 소모되었다. 벤은 다니엘이 말을 멈출때마다 그가 갑자기 울거나 하지않을까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그의 옆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니엘의 옆 얼굴로 쏟아지던 보기 드문 런던의 햇살은 점차 붉은 노을로 바뀌어갔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의 뺨 위로 길어진 그림자는 곧 완전한 어둠으로 바뀌었으며 두 사람은 노트북의 희미한 불빛에만 의지한 채 자정이 될 때까지 작업을 계속했다.
"..나는 그의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거라는 생각을 했다."
다니엘은 나지막히 글귀를 암송했다. 시시하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다니엘은 이것이 별 것 아닌 양, 마치 형편없는 자서전의 일부인 양, 감정없는 목소리로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혀 시시한 것이 아니었다. 벤은 부지런히 타이핑을 하면서도 몇 번이고 숨을 삼켜야했다. 지금 그가 타이핑 하고 있는 건 다니엘이 여태 썼던 것 중 최고의 걸작이 될 것이 분명한 대작이었다.
이런 순간이면 벤은 다니엘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던 날을 떠올리곤 했다. 그날 벤은 자신의 습작을 모두 불태워버렸다. 열등감이 사그라든 자리에는 무한한 존경심이 생겨났다. 그 무렵의 벤은 다니엘을 만날수만 있다면 그가 죽으라고 명령한데도 기꺼이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존경하는 대 작가를 만났을 때, 다니엘이 입을 열어서 처음으로 꺼낸 말이 정말로 "꺼져, 죽어버려." 일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다니엘은 한 챕터의 마무리를 남겨두고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 다른 것 같았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달래고, 어르고, 애원하고, 협박해가며 간신히 한 문단 한 문단을 쥐어 짜냈다. 아마 편집자로서의 사명보다는 소설의 뒷 내용이 궁금했던 탓이 더 컸다.
벤은 가까스로 마무리한 원고를 정리하며 다니엘을 향해 물었다. "식사는요?" 다니엘은 몇 겹씩 껴입은 옷가지와 몸에 둘둘 만 담요로 지저분한 바닥을 쓸며 부엌으로 향하더니 마시다 만 와인을 몇 병 끌어안고서 거실로 돌아왔다.
"난 이거면 됐어."
다니엘은 쇼파에 반 쯤 드러누운 채 병째로 와인을 마시기 시작했고 벤은 청소를 시작했다. 쓰레기와 찻잔과 옷가지와 책을 구분해서 치우던 벤은 어느 시점에서 그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는 걸 깨닫고 그냥 손에 잡히는대로 전부 다 쓰레기 봉투에 쑤셔담기로 했다.
세탁기를 작동시킨 후 거실로 돌아왔을 때 다니엘은 쇼파에서 잠들어있었다. 다행히도 평온한 얼굴이었다. 벤은 다니엘의 머리 밑에 조심스럽게 베개를 밀어넣고 얼굴에서 안경을 벗겨냈다. 벤은 그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살짝 매만져 준 뒤 시험삼아 다니엘의 귓가에 속삭여보았다.
"주무세요?"
다니엘은 깊이 잠든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혹시나 한 밤 중에 깨어날지도 몰랐다. 오늘은 평소보다 감정소모가 심한 하루였고 이런 날 그가 어둠 속에서 혼자 눈을 뜨도록 내버려두는게 현명한 선택 같지는 않았다. 그래서 벤은 다니엘의 집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3.
벤은 고양이의 울음소리에 눈을 떴다. 창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공기는 싸늘했다. 카페트 위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있었던 그는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서 '티오' 하고 작게 고양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고양이는 부엌 어디에선가 야옹거리기만 할 뿐 다가오지 않았다.
벤은 어둠을 더듬고 일어나 부엌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득, 어둠 속에서 낯익은 그림자와 마주했다. 그림자는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 고양이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입에 물린 담뱃 불이 붉은 점처럼 보였다. 손에 감아두었던 붕대는 언제 풀어버렸는지 드러난 손은 얼룩덜룩한 피멍과 상처자국으로 가득했다. 벤은 한숨을 쉬었다.
다니엘은 티오에게 밥을 주고 나서는 찻주전자를 렌지에 올렸다. 그가 달그락거리며 차를 만드는 동안 벤은 그의 동선을 가만히 눈으로 쫓았다. 다니엘은 곧 두 잔의 차를 만들어 테이블로 가져왔다.
두 잔 이라는 점은 벤에게 있어서 퍽 중요했다. 그는 지난 6개월 동안 다니엘을 사회화 시키기 위해 무단히 애써왔다. 벤은 지금 자신의 몫으로 놓여진 차를 보며 그의 교육이 아주 쓸데없는건 아니었단걸 되새겼다. '그' 다니엘 크레이그가 자신을 위해 차를 만들어 줬다는 것. 부탁이나 강요가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선의로.
벤은 이러한 비밀스러운 우월감이 자주 자신을 찾아온다는 것을 인정했다.
열성팬들이 보내온 편지를 봉투도 뜯지 않고 쓰레기통에 집어 넣을 때나, 다니엘과 하룻밤을 보낸 여자를 새벽이 오기전에 쓰레기와 함께 집 밖으로 내 보낼 때 특히 그랬다. 그들은 가엽게도 자신들의 노크가 언젠가는 다니엘에게 닿을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한다해도 그들은 영원히 다니엘의 바깥에 머물것이다. 벤은 그 문을 아무에게도 열어 줄 생각이 없었으므로.
벤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어느새 불편할만큼 자라난 다니엘의 금색의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오늘이나 내일쯤 잘라줘야 할 것 같았다.
언제부터인가 창 밖에는 비가 내렸다. 벤은 창문을 열고서 차가운 겨울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비와 안개의 냄새가 났다. 시간은 새벽 5시를 갓 넘기고 있었다. 새벽의 찬 바람과 마주하자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흡연욕구가 벤을 찾아왔다. 벤은 다니엘의 담배를 훔쳐 불을 붙였고 20여일의 금연은 그렇게 끝이 났다.
벤이 창가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는 동안 다니엘이 그의 등 뒤로 다가왔다. 다니엘은 한 손으로 벤의 허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그는 벤의 어깨에 살짝 턱을 괴고 장난감을 조르듯이 물었다.
"만져도 돼?"
벤은 대답 대신에 어깨를 으쓱했다.
다니엘의 차가운 손이 벤의 옷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의 손은 어떤 목적을 갖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다니엘은 그저 난로앞으로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벤의 체온을 쫓아서 달라붙곤했다.
이전에 벤은 몇 번인가 자신의 침대로 들어오는 다니엘을 기겁해서 밀어낸 적이 있었다. 그가 어떤 성적인 의도나 기타 불순한 욕구를 갖고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는걸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이후로 벤은 대게 다니엘이 자신을 만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가 다니엘을 위해 청소를 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식사를 차리는 것과 다를것이 없는 어떤 직업적인 의무라고 생각했다.
다니엘의 입술이 벤의 귓볼을 살짝 물었다가 놓았다. 이윽고 목덜미로 이어진 키스는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 벤의 어깨에 닿았다. 다니엘은 벤의 어깨에 입술을 붙인채로 기분 좋은듯 낮게 웃었다. 그의 웃음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벤은 얌전히 담배를 피우며 오늘의 스케쥴에 대해서 생각하려 노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쉬운일은 아니었다.
4.
"잠수를 해봐야겠어."
다니엘은 완성한 챕터에 구둣점을 찍으며 말했다. 그 무렵 벤은 다니엘의 이름 앞으로 날아 온 고지서와 각종 초대장들을 분류하는 중이었다. 벤은 다니엘이 어떤 갑작스러운 발언을 하더라도 여태까지의 다른 편집자들처럼 '무슨소리세요?' 하고 멍청하게 되묻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벤은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 다니엘의 벤의 그 점을 항상 높이 샀다.
벤은 다니엘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뜸을 들이다가 작가협회에서 보내 온 시상식 초대장을 '버릴 것' 으로 분류하고 나서야 그를 쳐다보았다.
"다이빙 자격증 없으시잖아요."
"장비들은 필요없어. 물살이 강한 호수면 좋겠는데."
"안됩니다."
벤은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 단호하게 말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다니엘의 수 많은 단점 중 하나는 사람의 말을 도저히 귀담아 듣지 않는다는거였다. 다니엘은 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드러나는걸 보는게 즐거웠다. 벤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다니엘의 시선을 무시하려 했지만 그다지 효과좋은 전술은 아니었다. 어느새 벤의 곁으로 다가와 앉은 다니엘은 벤의 뒷 목에 얼굴을 묻고서 보채듯이 "정말로 안돼?" 하고 속삭였다. 벤은 귀찮게 달라붙는 다니엘을 다시 한번 밀어냈다. 오늘의 다니엘은 얌전한 반면에 평소보다 다루기가 힘들었다.
"이 계절에 맨 몸으로 잠수를 할거라구요? 정 그러고 싶다면 친구가 많으셔야 될걸요."
"무슨 뜻이야?"
"순식간에 천국이나 지옥에 가게 될테니 기왕이면 양 쪽 모두에 친구가 있는 편이 좋겠죠."
벤은 쌀쌀맞게 말했다.
비 온 뒤 갑작스럽게 날씨가 추워짐에 따라 다니엘의 행동 반경은 점점 난로가 있는 거실 카펫 위로 한정되어 갔다. 벤에게 달라붙어 체온을 탐하는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그는 지금도 벤의 손을 쥐고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유독 추위를 타는 다니엘이 제 발로 얼음 같은 물 속으로 들어가겠다는 건 분명히 작품과 관련된 일일 가능성이 컸다. 어찌됐든 그건 틀림없이 미친짓이었고 다니엘이나 떠올릴 법한 생각이었다. 벤은 소설의 다음 전개가 궁금해졌다.
"레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나요?"
다니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에 방금 작업을 끝낸 원고가 담긴 노트북을 벤에게 밀어보였다. 반짝이는 커서 아래에 놓여진 단어 한 개가 벤의 눈을 사로잡았다.
'missing.'
벤은 자신이 소설 속의 인물과 사랑에 빠져있다는 걸 일찍이 인정했다. 레이는 쫓기고 내몰리고 사냥당한 후 차가운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끝없이 가라앉아 바닥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는 공식적으로 실종되었다. 모든 과정은 지독하고 냉정했다. 벤은 자신이 지금 읽고 있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벤의 수 많은 장점 중 하나는 프로의식이 뛰어나다는 거였고 '이전에 이런 얘기 한 적 없으셨잖아요!' 하고 소리를 지르기 직전에 겨우 자신을 참아냈다. 대신에 벤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불을 붙였다.
"설득력이 부족해. 직접 물 속에 들어가봐야겠어."
그리고 다니엘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소설에 대해 조금 따분한 듯, 관심없는 누군가의 꿈 이야기를 하는 듯,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담배 연기 사이로 바라보며 심장의 통증을 느꼈다. 그리고 오래전에 자기 손으로 불태워버린 어떤 감정의 존재감을 느꼈다. 죽어버린 줄 알았더니 오랜시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새 것 같은 그 감정. 벤은 자신의 열등감이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벤은 다니엘이 한밤의 호수가에 서 있는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소설속의 레이처럼 단정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니엘은 벤을 향해 잠깐 뒤돌아 보더니 이내 각오한 듯 천천히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좀처럼 깊어지지 않던 수위가 어느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머리 끝까지 차올랐다. 다니엘은 계속해서 물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그리고 충분한 설득력이 생길 때까지 오래 잠수했다.
벤은 이 이미지에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하고 병신같은 아이디어였다.
"실내 시설을 대여해보죠." 벤은 재떨이에 담배를 눌러끄며 말했다. 다니엘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더 이상의 투정은 하지 않았다.
벤은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걸쳤다. 그가 자신의 물건을 챙기는 동안 다니엘은 벤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코트 소매 밖으로 반 정도 드러난 섬세한 그 손은 서류와 노트를 가방에 챙겨 넣더니 우아한 움직임으로 코트의 단추를 잠그고 머플러를 목에 둘렀다. 그리고 앞 머리카락을 살짝 다듬고 옷 매무새를 만지더니 곧 벤의 코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다니엘은 자신도 모르게 벤에게 다가가 그의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벤의 손을 끄집어 내더니 자신의 손 끝과 얽어들어갔다. 다니엘은 우스울만큼 진지한 태도로 벤의 손과 깍지를 끼고서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자고 가."
오늘의 다니엘은 정말이지 평소보다 다루기가 힘들었다. 벤은 오늘 하루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다니엘을 밀어냈다. 그리고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걸어나갔다. 다니엘은 배웅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 새벽 2시, 벤은 응급실로부터 다니엘이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 자신의 풀장에 뛰어들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5.
"죽으면 기분이 어떤가요?"
벤은 다니엘의 얼굴에 까슬까슬하게 자라난 수염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면서 물었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다니엘의 의식은 어두운 바닥에 잠들어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난 이틀동안 다니엘은 아주 잠깐씩 의식을 회복했다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기를 반복했다. 잠시나마 눈을 뜬 몇 초 동안에도 그는 현실로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하는 듯 했다. 다니엘은 의미 없는 몇 마디의 단어를 꿈처럼 중얼거리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몇 번의 정밀 검사를 했지만 그의 뇌에는 문제가 없었다. 운 좋게도 육체적 손상은 오른쪽 폐의 염증으로 그쳤다. 뇌에 외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는 건 아마도 정신적인 문제일 터였다.
벤는 다니엘의 침대에 걸터앉아 그의 몸 중에서 한 번도 만져보지 못했던 곳들을 손 끝으로 하나하나 탐색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다니엘의 발등 위를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바지를 걷어올리며 발목을 지나 무릎 뒤쪽까지 만져올라갔다. 벤은 다니엘의 무릎 뒤에 숨어 잘 보이지않는 흉터를 더듬어 확인했다. 이것은 두 사람이 만나기 훨씬 전에 생긴 흉터였고 벤은 언제나 그것을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의 몸에는 벤이 잘 알고있는 상처도 많았다. 벤은 다니엘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끌어올렸다. 팔뚝에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화상자국이 붉게 남아있었다. 벤은 손가락으로 원을 그리며 상처 위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이것은 난롯불을 쳐다보던 다니엘이 무의식중에 그 속으로 팔을 집어 넣었을 때 생긴 상처였다.
"..화상은 아주 오래 남지. 난 당신이 이 흉터를 볼 때마다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지 떠올려주길 바랬어."
벤은 잠들어 있는 다니엘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벤은 영원히 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세상에 그런 건 없으니까.
다니엘이 깨어난 건 3일째의 아침이었다. 벤이 커피를 사러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다니엘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마치 설핏 잠이 들었다가 짧은 꿈을 꾸고 깨어난 사람처럼 그곳에 있었다. 다니엘의 파란 눈동자는 멍하니 벤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다시 스르륵 감겼다. 벤은 그가 다시 의식을 잃을까봐 깜짝놀라 다니엘을 흔들어 깨웠다.
"선생님, 잠들지 마세요!"
벤은 다니엘을 일으키기 위해 그의 팔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다니엘의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병실은 한여름처럼 더운 온도로 맞춰져 있었지만 그는 추위에 내던져진 사람처럼 떨고있었다. 벤은 다니엘의 손을 쥐어서 입으로 가져가 호 하고 입김을 불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벤의 생각엔 무언가가 그 순간 다니엘을 붙잡아 준 것 같았다. 벤은 다니엘의 손가락에 작은 키스를 했다. 그리고 손바닥에도, 손목에도 키스했다. 다니엘의 떨림이 천천히 멈추었다. 벤은 다니엘의 어깨를 끌어안고 아이를 달래듯이 토닥여주었다.
시간은 몹시 느리게 흘렀다. 벤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다니엘을 안고서 피로와 고통을 느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이대로 아무것도 더 나빠지거나 나아지는일 없이 영원히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벤은 영원히 라는 말을 싫어했다. 그건 유리로 만든 장미처럼 아름답고도 부서지기 쉬운 말이었다.
6.
퇴원한 이후 다니엘은 전례가 없을만큼 얌전하게 지냈다. 그는 의사의 권고에 따라 금연을 시작했고 세끼 꼬박꼬박 밥을 먹었다. 처방받은 수면제 또한 몰래 토해내는 일 없이 잠자코 복용했으며 그 덕분에 다니엘은 벤이 아는 한 처음으로 하루에 5시간 이상 씩을 잤다. 다니엘은 불평 없이 하루종일 글을 썼고 자주 웃었다. 그는 어느 때보다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니엘은 단 한 번도 벤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검은 색이 나을까요?"
벤은 세탁소에서 찾아 온 다니엘의 수트를 침대 위에 펼쳐놓고 수십 분째 넥타이 색을 결정하지 못해서 고민중이었다. 검은 색의 맞춤 정장에는 어떤 색의 넥타이도 잘 어울렸지만 벤은 최대한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
다니엘은 깨끗하게 다려진 흰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한참동안 커프스 단추와 씨름하던 다니엘은 결국 포기하고 벤에게 팔을 내밀었다. 벤은 그의 양 쪽 팔목 모두에 단추를 채워주고 소매 단을 손 끝으로 다듬었다. 최근 들어 체중이 조금 늘긴 했지만 셔츠는 그의 몸에 딱 맞았다.
벤이 계속해서 넥타이 색을 고민하는 동안 다니엘은 바지를 입고 벨트를 채웠다. 벤은 그러한 다니엘을 조금 멀리서 지켜보다가 검은 색 넥타이를 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목에 넥타이를 두르고 한 바퀴 매듭을 지었다.
"역시 검은 색이 낫네요."
벤은 만족한 듯한 미소를 지으며 익숙한 손놀림으로 넥타이의 매듭을 완성지었다. 마지막으로 벤은 다니엘의 어깨에 떨어진 가느다란 금발 머리카락을 몹시 신중한 표정으로 떼어냈다. 벤은 자신의 손가락이 다니엘의 옷을 더럽히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듯 조심스럽게 다가와서는 살짝 머리카락을 집어 작은 호흡과 함께 멀어져갔다. 벤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고 있는 다니엘의 시선을 눈치챘지만 모른척 했다. 벤은 다니엘에게 윗 옷을 입히고 구두를 신겨주었다. 그리고 향수를 뿌린 후 다니엘의 귓가에 코를 대고 향을 맡았다. 완벽했다. 외출 준비가 모두 끝났다.
다니엘은 어제 벤에게 여태 한 번도 참석한 적 없었던 연말 시상식에 가고 싶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벤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할 일을 했을 뿐이었다. 그는 주최측에 참석을 희망한다는 답신을 보내고 옷을 준비했다. 그리고 수상을 대비해 다니엘을 대신해 짧은 연설을 썼다. 서너줄 정도의 짧은 감사 연설에 벤의 이름은 없었다. 벤은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집중장애가 있는 다니엘을 2시간가량 이어지는 시상식에 얌전히 앉혀두기 위해서는 약간의 알콜이 필요했다. 벤은 다니엘이 끝없이 샴페인을 마셔대는걸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두문불출의 천재작가 다니엘이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건 거의 처음이었기에 그날 행사의 중심은 단연 다니엘이었다. 다니엘은 몇 명째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과 악수를 했고, 다행히도 얌전히 웃었고, 사람들이 가져오는 책 마다 사양없이 싸인을 해주었다. 벤은 그것이 알콜 덕분인지 아니면 최근 다니엘이 보여주는 비정상적일 정도의 평범한 모습 덕분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느 쪽이 됐든간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벤은 완벽한 수트 아래에 숨어있는 다니엘의 흉터 투성이 몸을 생각했다. 그리고 벤의 허리를 감아오던 진득한 팔과 끊임없이 부딪혀오던 버릇없는 입술을 생각했다. 그것이 벤이 생각하는 진짜 다니엘이었다. 벤은 다니엘의 반듯한 옆 모습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다니엘은 올해도 당연히 수상 이력에 한 줄을 더 추가하게 되었고 예년과는 다르게 직접 상을 수상했다. 그는 열성적인 환호와 함께 무대 위에 올라 벤이 적어준 연설을 그대로 읽었다. 그리고 그 서너줄 정도의 짧은 감사 연설에 벤의 이름은 없었다. 벤은 그것이 당연히 맞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니엘이 편집장의 이름과 소속 에이전트 직원 몇 명의 이름을 불렀을때, 그리고 아주 오랜 세월동안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의 가족 이름과 아주 미미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동료 작가 몇 명의 이름을 불렀을때, 공허하기 이를데 없는 감사 인사가 청중들의 박수를 이끌어 낼 때.
그 연설은 벤이 적어준 그대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벤은 자신의 이름이 그 곳에 없다는 것에 문득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저 이름들 중 그 누구도 자신보다 다니엘을 알지 못했다. 벤은 말 그대로 다니엘의 머리 끝 부터 발 끝까지 모든 것의 이유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다니엘의 분노와 고통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지 지켜보았으며 무엇보다 그의 소설이 어떻게 시작해서 어떻게 끝나는지 가장 먼저 알고 있는 한 사람이었다.
누군가가 무대 위의 다니엘에게 다가가 꽃을 건냈다. 그는 순식간에 사람들에게 둘러쌓인채 애프터파티를 위해 무대 뒤로 떠났다. 벤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어디선가 닫혀진 문이 두들겨 열리는 소리를 들은 듯 했다. 그는 자신이 그 문의 손잡이를 쥐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설마 다니엘이 먼저 그 문을 열고 세상 밖으로 나올거라고는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7.
벤은 운전대에 이마를 기대고 피곤한 눈을 감았다. 라디오에서는 폭설로 인한 도로의 정체가 새벽까지 이어질거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라디오 채널을 돌리자 어느 채널에서도 모두 크리스마스 캐롤을 틀어댔다. 벤은 라디오를 껐다. 차 속에 갇혀있는 몇 시간 동안 눈은 끝없이 내렸고 세상은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다니엘은 뒷좌석에서 울고 있었다.
다니엘은 시상식에서는 물론, 후에 이어진 애프터파티에서도 내내 기분이 좋았고 심지어는 약간 들떠 있는것처럼 보였다. 벤은 시계를 내려다 보았다. 약 먹을 시간이 지난지 오래였다.
벤은 다니엘의 옷깃을 붙잡고서 선생님, 잠깐만요, 하고 몇 번이나 그에게 시간을 달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귀찮은듯 건성으로 대답할 뿐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벤은 사람들이 듣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니엘의 귓가에 약 먹을 시간이 되었다고 속삭였다. 다니엘은 살짝 눈썹을 올렸다가 내리며 벤을 쳐다보았다. 그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한 번에 비우고 벤의 귓가에 대답했다. 오늘 밤엔 수면제 대신에 알콜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그동안 한 번도 약을 빼먹지 않았던 다니엘은 오늘 처음으로 약을 거부했다. 한 번이라도 거르면 내성을 키우게 될 거라는 벤의 잔소리는 아무래도 통하지 않았고 다니엘은 못들은 척 다시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다. 다니엘은 금새 누군가의 농담에 웃음을 터트렸다. 벤은 다니엘에게 한마디를 더 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대신 자신의 주머니에 들어있는 약병을 손으로 꽉 쥐었다.
사소한 문제가 생긴 건 한 시간 정도가 지난 후였다. 다니엘의 행동을 지켜보던 벤은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게 그의 말 수가 적어졌단 걸 눈치챘다. 다니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입을 다물기 시작했고 더이상 잘 웃지 않게 되었다. 엄지 손톱을 물어 뜯기 시작했고 불안한 시선은 줄곧 바닥을 향했다. 그러다가 그가 태엽이 멈춘것처럼 제자리에 멈춰서서 아무와도 눈을 맞추지 않게 됐을 무렵에, 주위의 사람들이 조금 불편한 표정으로 "미스터 크레이그?" 하고 그에게 걱정스레 말을 걸기 시작했을 무렵에, 벤은 집으로 가야 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사람들을 해치고 다니엘에게 다가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이 너무 취했네요."
벤은 다니엘에게 손을 내밀었고 다니엘은 그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잠깐 사이에 창백해진 다니엘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움이 어려있었다. 벤은 다니엘을 부축해 천천히 파티장 밖으로 이끌었다. 비틀거리기 시작한 다니엘은 계속해서 주저앉으려 했고 벤은 몇 번이고 그를 일으켰다. 그는 정말로 취한 사람처럼 보였기에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같은 얼굴을 하고서 벤에게만 들리는 작은 목소리로 정말 싫어, 라고 반복해서 말했다. 주어도 목적어도 없었지만 벤은 그의 말을 이해했다. 벤은 그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며 간신히 그를 걷게 했다.
주차요원이 차를 찾아 올때까지 다니엘은 벤에게 매달려있었다. 그는 싫다는 말만을 끊임없이 반복했다. 곧 차가 도착하자 벤은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다니엘을 억지로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벤은 운전석에 앉아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몇 분 되지않아 다니엘은 갑작스럽게 울기 시작했다. 벤은 놀라지 않았다.
다니엘은 자신이 먹는 수면제에 항우울제도 포함되어있다는 걸 몰랐다. 벤이 여태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에.
다니엘은 집에 도착하는 네 시간 내내 울었다. 그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밸런스 붕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벤은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자동차가 집 앞에 도착하자 벤은 아직도 반 쯤 탈진한 채로 울고 있는 다니엘을 차에서 끌어냈다. 다니엘은 두 발로 똑바로 서지 못하고 이내 새로 쌓인 하얀 눈 위로 쓰러졌다. 그는 눈 위에 엎드린채로 숨 쉬듯이 흐느꼈다.
"선생님, 일어서세요."
벤은 그를 일으키는 대신에 조용히 말했다. 다니엘은 벤의 말에 몸을 일으키다가 다시 넘어졌다. 그러나 벤은 도와주지 않았다. 다니엘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벤을 올려다 보았다. 벤은 혼자서 걸어가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네 발로 기다시피 몇 걸음을 걸었다. 그리고 다시 쓰러졌다. 다니엘은 울면서 눈 속을 기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돌아보고는 다시 다가와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양 팔을 넣고 일으켰다. 다니엘은 이번에는 넘어지지 않고 벤에게 기대섰고 두 사람은 눈 속을 걸어 집에 도착했다.
벤은 다니엘을 방으로 데려가 겉옷만 벗긴 채 침대에 눕혔다. 다니엘은 숨을 몰아쉬며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고있었다. 벤은 자신의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다니엘의 앞에서 달칵달칵 하고 흔들었다. 다니엘은 그 소리에 눈을 뜨고 벤을 쳐다보았다. 벤은 다정하게 말했다.
"약을 드시면 괜찮아 질거에요."
다니엘은 절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벤은 약통을 등 뒤로 던져버렸다. 약통은 데구르르 굴려 어딘가 벽장 아래로 굴러 들어갔다. 다니엘은 너무 울어서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힘겹게 뜨고 다시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벤은 자신의 코트와 자켓을 벗어 떨어트렸다. 그리고 다니엘에게 다가가 그의 배 위에 올라탔다. 벤은 다니엘의 넥타이를 잡아당겨 느슨하게 풀었다.
"하지만 전 그걸 바라지 않아요."
벤은 하얗게 드러난 다니엘의 목 위에 키스했다.
다니엘은 벤의 입술이 닿은 자리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 몸을 달려 발 끝까지 도착하는 걸 느꼈다. 그는 벤의 옷자락을 손아귀가 하얗게 될 때까지 움켜쥐었다. 다시금 눈물이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동시에 그의 에너지는 완전히 바닥났다. 그의 손 안에서 벤의 옷자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벤은 다니엘의 목에 입술을 갖다대고서야 그의 피부가 데일듯이 뜨거워진 것을 알았다. 열로 들뜬 살에서는 보송보송하고 달콤한 냄새가 났다. 벤은 그 향기에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는 다니엘의 양 손을 가슴 앞에 모아쥐었다. 그리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 없이 축 늘어진 다니엘을 내려다보았다.
벤은 다니엘의 비싼 수트와 셔츠 아래에 숨겨져있는 뜨거운 몸을 생각했다. 그 속에서 뛰고있는 심장을 생각했다.
벤은 자신이 그것을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8.
"선생님, 제 말 들리세요?"
다니엘은 자꾸만 감겨드는 눈을 힘겹게 다시 떴다. 그의 불투명한 시야에 희고 아름다운 것이 아른거렸다. 그건 다니엘의 셔츠 단추를 풀어내리는 벤의 손이었다. 다니엘은 습관처럼 그 움직임에 시선을 빼앗겼다. 벤의 손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 다니엘의 벨트 버클을 풀고 바지 지퍼를 내렸다. 다니엘은 마치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전혀 움직이지 못한채 그저 눈만 흐릿하게 깜빡였다. 온 몸이 너무도 무거웠다. 피부가 한뼘 한뼘 드러날때마다 추위가 그를 덥쳐왔다.
벤은 다니엘의 바지와 속옷을 벗겨내리고 그의 양 발목을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고 마치 점자를 읽듯이 집요하고 지독하게 다니엘의 피부 위를 손 끝으로 훑어나갔다. 발목부터 시작해서 허벅지까지, 배꼽과 쇄골을 가로질러 턱까지. 다니엘의 몸은 벤이 익히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으나 평소와 달리 펄펄 끓는 듯한 피부의 열기는 새삼 모든 것을 낯설게 했다. 벤은 차가운 손바닥을 다니엘의 배에 얹었다. 그의 손은 다니엘의 호흡과 함께 조용히 오르내렸다. 벤은 그 모습이 참을 수 없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대답하지도, 반응하지도 않았다. 깊이 잠든 사람처럼 고른 숨을 쉬며 축 늘어져있을 뿐이었다. 간혹 깜빡이며 열리는 푸른 눈동자만이 그가 의식이 있다는 걸 증명해주었다. 벤은 다니엘의 허벅지 안쪽 부드럽고 연한 살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손 안 가득 살을 쥐고 아플만큼 꽈악 쥐었다가 다시 놓기를 반복하는 동안 다니엘의 호흡은 조금씩 가빠졌고 배의 오르내림 역시 조금 빨라졌다. 벤은 다정하게 말했다.
"좋아해서 이러는거에요."
벤은 예고없이 다니엘의 입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지난 몇 시간동안 너무 울어서 붓고 헐어버린 점막은 뜨겁고 부드러웠다. 그는 다니엘의 혀를 손가락 사이로 굴리며 손톱으로 내키는만큼 상처입혔다. 그는 마찬가지로 예고 없이 다니엘의 다리를 벌리고, 뒤쪽의 좁은 구멍에 피와 침으로 젖은 손가락 두개를 집어넣었다. 다니엘의 온 몸의 힘이 빠진 덕분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들어갔다. 벤은 안쪽에서 손가락을 움직이며 마찬가지로 내키는만큼 손톱으로 상처입히고, 벌리고, 손가락을 늘려 나갔다. 다니엘의 반쯤 뜨인 시선은 아무런 의사나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머나먼 꿈같은 통증이 지나갈 때마다 깜빡 하고 감겼다가 열리곤 했다. 벤은 다니엘이 버진일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가능한 한 처음이었으면 했다. 적어도 이런식으로 하는 건 처음이었으면 했다. 벤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자신의 성기 위에 침을 뱉았다. 그리고 비정상적일 정도로 뜨거운 다니엘의 속으로 밀어넣었다. 그다지 어렵진 않았다. 땀과 피와 침으로 젖은 구멍은 충분히 매끄러웠고 다니엘은 일말의 거부의 몸짓도 보이지 않았다.
다니엘의 호흡은 아주 조금 더 빨라졌고 창백한 피부 위로 붉은 색이 번져나갔다. 목 울대가 울렁거렸고 귀 끝과 코 끝은 빨갛게 물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잠든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 벤은 발기하지 않은 다니엘의 성기를 손 안에 쥐고 자극했다. 오늘 다니엘은 금방 발기하기엔 술을 너무 많이 마셨고 너무 많이 지쳐있긴 했지만 온 몸의 점막이 약해진 상태였기에 자극에 민감했다. 다니엘은 처음으로 입을 열어 벤,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벤은 서두르지 않으려고 계속 노력했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건 믿기지 않을만큼 힘든일이 되었다. 벤은 다니엘의 허리를 잡고 바싹 끌어당겼다. 맞닿은 곳에서 질척이는 소리가 나며 두 사람은 더 이상 틈이 없을만큼 깊이 이어졌다. 벤은 다니엘의 안쪽이 생리적으로 오므라들며 조여오는걸 느끼고 자신도 모르게 다니엘의 허리에 손톱을 박아넣었다.
다니엘은 벤의 이름을 딱 한 번 불렀던 이후로 다시는 말을 하지도,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가쁜 숨소리만이 둘 사이를 오갔다. 버틸 힘이 없었던 다니엘은 벤이 세게 움직일때마다 점점 뒤로 밀려나갔고 벤은 다니엘의 양 손목을 쥐고 잡아당기며 허리를 움직였다. 얼마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벤은 사정감이 찾아 온 다니엘의 뜨겁고 부들부들한 내벽이 바들바들 떨리는 걸 느꼈지만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다니엘은 젖은 눈을 들어 벤을 올려다보았다. 그 눈에 담긴 애원을 읽었지만 벤은 그렇게 쉽게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정말, 좋아해서 이러는거에요."
벤은 허벅지가 아릿하게 아파 올 정도로 살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강하게 움직였고 허공에 들린 다니엘의 다리는 벤의 움직임에 따라 힘 없이 흔들렸다. 다니엘의 숨소리는 점점 흐느낌으로 변해갔고 곧 울음소리로 변했다. 다니엘은 어린아이처럼 딸꾹질을 하며 엉엉 울어댔다. 어느샌가 다니엘은 자신의 배 위에 사정했지만 스스로 그걸 눈치채지 못한 듯 했다. 내벽은 여전히 쉴 새 없이 조여들었고 박자에 맞춰서 격렬하게 진동했다. 이윽고 다니엘의 울음이 점점 멎어들고 그의 떨림이 잦아들기 시작했을 때, 벤은 닿을 수 있는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 들어가서 한참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다니엘의 파란 눈을 바라보며 여자를 임신시키듯이 깊숙히 사정했다. 정말로, 좋아해서 그런거에요. 벤은 같은 말을 되뇌었다. 정말이에요. 벤은 아직까지 쥐고있던 다니엘의 손을 놓아주었다. 다니엘의 손목에는 시뻘건 자국이 남았다.
다니엘은 문득, 자유로워진 손으로 무언가를 찾는 듯이 천천히 침대 위를 더듬었다. 벤은 그런 다니엘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것은 오늘 밤 다니엘이 보여준 자발적인 첫 움직임이었다. 다니엘은 곧 자신의 옆에 놓인 벤의 손을 찾아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벤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그리고 벤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어들었다. 그는 몹시 느리게, 하지만 확실한 의지로 벤의 손에 깍지를 꼈다. 벤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니엘은 다 쉬고 갈라진 목소리로,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겨우 한 마디를 말했다.
"..자고 가."
그리고 다니엘은 기절과도 비슷한 잠 속으로 서서히 빠져들었다.
벤은 두 사람의 손을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9.
다니엘은 짧은 꿈에서 깨어 새벽에 눈을 떴다. 평생 그를 따라다닌 불면증은 오늘 같은 밤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곁에 잠들어 있는 벤이 깨지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나서 모포를 몸에 두르고 어두운 거실로 걸어나갔다.
다니엘은 최근들어서 벤에 관한 꿈을 많이 꾸었다. 꿈속에서 그는 주로 벤을 모욕하고 화를 내고 물건을 던지고 제 화를 못이겨 자해를 했다. 꿈의 끝에서 이상하게도 벤은 미안하다고 말했다. 사과하는 건 벤이었다. 다니엘은 잠에서 깨고나서 한참후에야 그것이 꿈이 아니라 기억의 일부란 걸 깨닫곤 했다. 벤이 여태 다니엘을 위해 해 온 일들은 '헌신적'이라는 말로는 부족했다. 그는 편집자로서 다니엘에게 마감일을 지키도록 만들었고 온갖 귀찮은 일들을 소리없이 해결했으며 심지어는 보모 노릇까지 했다. 게다가 그는 6개월 이상 큰 문제없이 다니엘과 함께 일했다. 그건 누구도 해내지 못했던 일이었다.
열이 내린 몸은 나른하고 가벼웠다. 창 밖에는 아직도 눈이 내렸다. 다니엘은 차가운 마룻바닥을 맨 발로 밟으며 깜깜한 집 안을 하릴없이 거닐었다. 그러는 동안 그는 이 집 구석구석에 벤의 꼼꼼한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하나도 없다는 걸 새삼 깨닫고 있었다. 찬장의 그릇과 찻잔은 날이 갈수록 숫자가 불어났다. 다니엘이 하나를 깨부수면 벤은 늘 두 개를 사왔기 때문이었다. 모든 방의 잠금장치는 제거되어 있었고 가구의 모서리는 천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구급상자 안에는 반창고보다 지혈제가 더 많았다. 벤은 아마도 매일매일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다니엘은 벤과 함께 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다니엘의 행동이나 말에 의문을 품는 대신에 한결같이 '네' 혹은 '아니오' 라고 대답했던 성실한 편집자. 도망치는 대신에 기꺼이 자신의 체온을 나눠주던 검은 머리카락의 어린 남자. 벤 휘쇼라는 사람.
벤이 긴 꿈에서 깨어 눈을 떴을 때 해는 이미 높이 떠있었고 다니엘이 누워있던 자리에는 고양이가 둥글게 몸을 말고 잠들어 있었다. 벤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니엘을 찾았지만 집 안 어디에도 그는 없었다. 벤은 문가에 서서 집 바깥을 둘러보다가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을 발견했다. 벤은 서둘러 옷을 껴입고 그것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발자국이 향한 곳은 마당의 작은 정원이었다.
세상은 온통 하얗고 순결했다. 발자국의 끝에는 눈 덮인 벤치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 웅크려앉은 다니엘의 뒷모습이 있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 너머 얼어붙은 장미 넝쿨이 저만치 보였다. 벤은 그에게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자신이 어젯밤 저지른 일에 대해 짓눌리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벤은 다니엘의 뒤에 서서 한참을 서성였다. 용기를 내어 한 마디를 하는데는 긴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 날씨가 추워요."
다니엘은 벤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보고 벤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푹 눌러쓴 모자와 칭칭감은 목도리 사이로 빼꼼히 보이는 다니엘의 얼굴은 아직도 어젯밤의 흔적이 남아 엉망이었다. 빨갛게 부어오르고 파랗게 질린 얼굴. 얼마나 오래 나와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속눈썹에 하얗게 얼음이 엉겨붙을 정도로는 오래 앉아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게다가 맨 발이었다. 벤은 다니엘의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손으로 감싸쥐어 품에 안았다. 다니엘은 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인채로 말했다.
"몇 번인가 널 해고하려고 했었어."
벤은 왜냐고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의 겉 옷을 벗어 다니엘의 다리 위에 덮어주고 그의 무릎에 이마를 기댔다. 다니엘은 그런 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어젯밤 일은 미안해."
다니엘은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은듯이 말했다. 하지만 벤은 그의 말에 심장이 멈출 뻔 했다. 벤은 고개를 들어 다니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추위에 붉어진 다니엘의 뺨위로 투명한 것이 떨어졌다. 다니엘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쥐었다. 그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리더니 곧 손가락 틈으로 눈물이 떨어졌다.
"난 사람들에게 나쁜 영향을 줘."
다니엘은 얼굴을 가린 채 정말로 미안한듯이 훌쩍훌쩍 울었다. 벤은 어째서 그가 사과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벤은 다니엘의 손목을 잡아당겨 억지로 그의 얼굴을 드러냈다. 울어서 더욱 못생겨진 얼굴은 눈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다니엘의 새파란 눈동자는 하얀 눈 속에서 더욱 선명했다. 그가 숨을 몰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공중으로 퍼져나갔다. 벤은 다니엘의 상처나고 갈라진 입술 위에 짧은 키스를 했다. 벤은 문득 이것이 둘의 첫 키스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붉어질데가 없다고 생각했던 다니엘의 뺨이 점점 더 빨갛게 변했다.
벤은 다니엘과 함께 했던 날들을 생각했다. 원하는 글을 쓰기 위해서 불 속에 몸을 집어넣거나 물 속으로 뛰어들곤 했던 작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자신의 글을 유일하게 맘에 들어 하지 않았던 남자.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사람. 미안해요, 하고 벤은 다니엘의 귓가에 말했다. 그리고 아마 그 누구도 그에게 해 준 적 없을 말을 진심을 담아 속삭였다. 괜찮아요.
두 사람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눈 속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댄 채 한 번도 하지 못한 얘기들을 했다. 다니엘은 끝없이 사과했고 벤은 끝없이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말이 멈출 때마다 키스를 하고 다니엘은 간혹 울거나 웃거나 했다. 마침내 두 사람이 따뜻한 집으로 돌아왔을 땐 어느 새 햇살이 먼저 집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다니엘은 난로 옆에서 콜록콜록 연신 기침을 하며 쓰다 만 원고를 읽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펼치고는 언제나처럼 다시 일을 시작했다.
벤은 오래전부터 줄곧 다니엘에 관한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다니엘은 햇볕이 드는 거실에서 하루종일 글을 썼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벤의 옷 속에 손을 집어 넣고 어린아이처럼 짧은 잠을 잤다. 이것은 벤의 가장 행복한 기억의 일부였다.
10. 외전
다니엘은 거짓말에 능숙했다. 그는 한 숨도 못 자거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는 핑계를 적당히 잘 꾸며냈다. 역겨운 기분을 숨긴채 오르가즘을 흉내 내는데 익숙했고 손목의 베인 듯한 상처는 단순한 사고로 인해 생긴거라고 흔히 의사를 속였다. 다니엘은 욱신거리는 몸을 이끌고 욕조 가장자리에 앉아 자신의 새로운 편집자가 될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니엘이 원했던대로 어리고, 경험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며...
"..그런데 내 팬이라고?"
다니엘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수화기 너머로 당혹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더군요. 싫으신가요?'
"정말 싫은데."
아마도 가위바위보에서 지는 바람에 다니엘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을 가여운 여직원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동안 그는 뜨겁게 데워진 욕조 속으로 들어가 천천히 몸을 뉘였다. 따뜻한 물이 온 몸을 감싸오자 그는 평소답지 않게 기분이 약간 너그러워졌다. 약간의 호의를 베푸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크게 선심쓰듯 말했다. '일단 한 번 만나보지 뭐.' 그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여직원은 황송해서 죽겠다는 취지의 감사인사를 몹시 길게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다니엘은 먼저 전화를 끊었다.
다니엘은 온 몸에 묻은 핏자국을 물에 씻어 내렸다. 수증기 아래 하얗게 드러난 피부는 찰과상과 피멍으로 엉망이었다. 어젯 밤 누군가와 싸웠던 기억은 있었지만 그곳이 어디였는지, 무슨 이유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침대는 피투성이였고 바닥엔 헤로인 주사기와 술 병이 나뒹굴고 있었으므로 아마 상대방은 약에 취해있었고 자신은 술에 취해있었으리라 추측할 뿐이었다. 문득 자신 보다 훨씬 크고 억센 손이 그의 머리채를 잡고 바닥을 끌고 다녔던 기억이 났다. 다니엘은 이것이 정말로 어제의 기억인지, 혹은 아주 어렸을 때의 기억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상처에 물이 닿자 곧 통증이 퍼져나갔다. 다니엘은 그 아릿한 통증이 맘에 들었다.
다니엘이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을 때 물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어있었다. 그는 자신이 제법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는 걸 알았다. 다니엘은 욕조에서 일어나 수건을 찾았다. 하지만 깨끗한 수건이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자 혼자서 조금 짜증을 내고, 온 몸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욕실 밖으로 나갔다. 여름이 가까워진 계절이긴 했지만 런던의 날씨는 여전히 싸늘했기에 그는 양 팔로 어깨를 감싸쥐고 살짝 떨었다. 다니엘은 알몸으로 현관으로 향했다. 다시 한 번 초인종이 울리고, 문 밖에서 긴장한 듯한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선생님, 안에 계시죠?"
다니엘은 에취 하고 재채기를 하며 동시에 문을 열었다. 문 밖에 서있는 어린 남자는 오래 연습한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과 공손한 미소, 신중한 눈빛. 하지만 그의 정교한 표정은 알몸의 다니엘을 발견한 순간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남자는 할 말을 잃고 굳어버린 듯 다니엘의 젖은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니엘의 하얀 나신은 마치 어둠 속에 창백한 불이 켜진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어쩔줄 몰라하다가 엉겁결에 집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선 남자의 뒤에서 문이 탕 하고 닫혔다.
다니엘은 팔짱을 끼고서 자신의 새로운 편집자를 관찰했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어리고, 경험이 없고, 머리가 좋고,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지만, 원치않게도 다니엘의 팬인 남자.
"...들으셔서 알겠지만 오늘부터 선생님의 새로운 담당이 된 벤자민 휘쇼입니다..."
자신의 이름을 벤자민이라고 말한 남자는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하며 준비한 한 마디를 간신히 입 밖에 꺼냈다. 다니엘은 벤의 얼굴에 떠오른 혼란과 당혹을 지켜보며 본의 아니게 즐거움을 느꼈다. 날 좋아한다고 했었지. 졸업 논문으로 내 소설에 관해서 썼다고 했어. 다니엘은 장난삼아 벤에게 천천히 한 걸음 다가갔다. 이에 당황한 벤은 도망친다는 느낌을 주지 않으려 애쓰며 동시에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벤은 문에 등을 부딪히고서야 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듯 했다.
다니엘은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팔을 들어 벤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다니엘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 방울이 벤의 얼굴 위로 툭 하고 떨어졌다. 벤은 그 차가움에 흠칫하고 놀라 다니엘의 몸을 확 밀어냈다. 다니엘이 멀어지자 그의 몸에서 나던 달콤한 비누향도 함께 멀어졌다. 다니엘은 조금 실망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뒤돌아 서서 벤을 내버려 두고 걸어갔다. 벤은 그의 흰 피부위에 남아있는 붉은 상처에 시선이 못박혔다. 그리고 무의식중에 가빠진 숨을 눈치 채지 못하고 어쩐지 숨쉬기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다니엘은 다시 욕실로 돌아가 미지근한 욕조 속에 몸을 첨벙하고 담갔다. 벤은 물 소리를 듣고 쭈뼛쭈뼛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다니엘은 몹시 다정한 목소리로 짧게 두 마디를 말했다. "죽어, 꺼져버려." 벤은 무언가가 크게 기대와 어긋나기 시작했다는 걸 느끼기 시작한 참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죽거나 꺼져버릴 생각은 조금도 없었기에 꾹 참고 그 자리에서 다니엘을 기다렸다.
간간히 들려오는 첨벙거리는 물 소리 외에는 다니엘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벤은 자신이 부쩍 나이를 먹어버린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천천히 주변을 살펴보다가 집 꼴이 엉망인걸 보고 널부러진 옷가지와 수건을 주워 모았다. 겸사겸사 세탁기를 돌리고 설거지를 하고 내친김에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킨 다음 바닥 청소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벤은 다니엘의 침실을 치우기 위해 들어갔다가 3초 만에 소리없는 비명과 함께 밖으로 튀어나왔다. 아무리 벤이라 해도 거기까지 면역이 생기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다니엘이 누운 욕조 속의 물은 이제 완전히 차가워졌고 그의 집은 점점 깨끗해졌다.
물 놀이에 질린 다니엘이 다시 욕실 밖으로 나왔을 때 벤은 서랍장에서 찾아 낸 깨끗한 타월 몇 장을 들고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벤은 당연한 듯이 다가와 다니엘의 어깨에 수건을 둘러주고 그의 머리 위에도 수건을 얹어주었다. 다니엘은 그 자리에 서서 벤이 조심스럽게 자신의 몸과 머리카락의 물기를 닦아주는 걸 내버려 두었다. 벤의 표정에는 더이상의 불확신은 없었다. 연습했던 미소나 공손함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금 화난듯한 얼굴을 하고서 해야 할 일을 한다는 태도를 취했을 뿐이었다. 다니엘은 벤의 불만에 찬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다니엘은 다시 한번 팔을 뻗어서 아까처럼 벤의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벤은 그의 몸이 추위에 달달 떨리고 있다는 걸 알고 이번에는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고양이털 알러지 있어?"
다니엘은 벤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고서 물었다. 벤은 다니엘의 식은 몸을 타월로 감싸 안고서 아니오, 라고 대답했다. 다니엘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벤은 다니엘의 새로운 편집자가 되었다.
다니엘은 거짓말에 능숙했다. 혼자서는 견딜 수 없어하면서도 사람을 끊임없이 시험하고 밀어냈다.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쉽게 부수었다. 다니엘은 정말로 솔직히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 할 때는 어떤식으로 말해야 하는지 배우지 못했다. 누군가를 붙잡고 싶을 때는 뭐라고 말해야 하는지 그는 결코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만난 후 몇 개월의 시간이 흐를때까지, 다니엘은 벤의 옷깃을 쥐었다가 그가 눈치채기 전에 슬쩍 놓아주기를 오랫동안 반복했다. 돌아서는 뒷모습에 안달이 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때때로 어린아이처럼 열이 올랐다. 벤은 열이 펄펄 끓는 다니엘의 곁을 밤새 지키면서도 그가 앓는 열병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와;; 진짜ㅠㅠ선물받은기분이다 벅차오른다 존잼이었다ㅠㅠ
답글삭제널 사랑한다ㅠㅠㅠ
답글삭제선새ㅇ님...진짜명작입니다.....너무좋아죽을것같습니다....존경합니다ㅜㅜㅜ
답글삭제슨상님 감동입니다ㅠㅠㅠㅠㅠㅠㅠ
답글삭제문학소설 한편 읽은것같다 ㅠㅠ 존나 슨상님 사랑해요 ㅠㅠㅠㅠㅠㅠㅠ
답글삭제나 다크비 여기서 잠들다 AD 2333~2013
답글삭제헐 ㄷㄷ...ㅠㅠㅠㅠㅠㅠ슨상님 사랑합미다ㅠㅠ
답글삭제와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사랑합니다 진짜 이거 명작임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답글삭제이후에 휘쇼다니엘로 한편 더 쪄오실순 없나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선생님 제가 사랑한다고 말했던가요ㅠㅠㅠㅠ
답글삭제작품이다 진짜....존좋...
답글삭제이글은사랑입니다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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